홍성택그린란드탐험대의 그린란드 북극권 종단을 위한 질주가 이어지고 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그린란드 내륙의 얼음 평원에서 추위 눈보라와 맞서 싸우고 발밑에서 언제 꺼질지 모를 히든 크레바스의 위협을 가로질러야 하는 고난의 대장정이다. 그린란드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썰매를 이용한 도전에 나선 탐험대와 동행한 본보 이성원 기자가 현장에서 탐험일지를 보내왔다.
하얀 얼음사막에서의 첫 밤
(5월 29일(현지 시간) 북위 68도 52분 14초, 서경 49도 21분 16초, 해발 980m)
드디어 출발이다. 쉽지 않은 걸음이었다. 계획보다 6일 이상이 늦었다. 대원들의 스트레스가 한계에 이르렀을 때다.
일루리삿공항에서 출발한 헬기는 거대한 일루리삿빙하를 지나 마침내 목적지에 무사히 내렸고 대원들은 드넓은 얼음사막의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방이 얼음과 눈으로만 된 평원이다. 주위를 둘러싼 둥그런 지평선이 하얗다. 구름이 그 하얀 얼음 지평선 위에 살짝 걸렸다. 마치 이승이 아닌 천상의 세계에 올라앉은 듯했다.
2차로 16마리의 썰매견이 헬기로 도착했고, 3차에 개썰매가 들어오면서 모든 탐험 준비는 끝났다. 차와 헬기를 타 스트레스를 받은 썰매견 때문에 이날 운행은 쉬기로 했다. 텐트를 치고 1박을 했다. 백야의 훤한 빛이 텐트 천장을 비추었다.
개썰매 제 속도를 못내다
(30일 북위 68도 37분 38초, 서경 48도 57분 56초, 해발 1,150m, 이동거리 40㎞)
첫 운행이다. 하늘이 너무 쾌청한 게 문제였다. 완벽한 시야는 좋은데 바닥의 눈이 푹푹 꺼져 개썰매의 속도가 늦어졌다. 사료와 사람까지 썰매의 무게는 이제껏 16마리 썰매견이 끌었던 것 중 가장 무겁다. 700㎏이 넘으니 말이다. 오르막을 만나 개들이 너무 힘들어 할 때는 썰매에서 내려 함께 밀어야 한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거나 뛰기가 만만치 않다. 가도 가도 하얀 벌판이다. 작은 풀 하나 살지 않는 얼음사막이다.
죽다 살았다
(31일 북위 68도 20분 02초, 서경 48도 42분 56초, 해발 1,313m, 이동거리 32㎞)
첫날에 비해 운행 준비 시간이 많이 줄었다. 오늘도 푹푹 빠지는 눈이 문제다. 개썰매가 도통 속도를 내지 못한다. 개썰매 뒤에 스키 한 짝씩을 매달고 그 위에 대원 한 명씩 올라타며 무게를 줄여 보지만 개들은 여전히 힘들어한다.
오후 2시가 지났을 때다. 또 개썰매가 멈췄다. 모든 대원이 내려 개썰매 옆으로 뛰었다. 유독 눈이 깊은 구간이었다. 내 왼발이 깊이 빠지는데 발목을 넘어 무릎까지 푹 들어간다. 어어 하는데 순간 허리와 가슴을 지나 머리까지 눈 밑으로 쏙 들어갔다.
히든 크레바스다. 눈으로 가려졌던 커다란 얼음 틈새에 빠진 것이다. 손을 내밀어도 땅 위에 닿지 않을 깊이까지 추락했다. 다행히 배낭이 얼음 턱에 걸리며 크레바스 틈에 몸이 끼었다. 발끝에 닿는 건 차가운 공기뿐. 아슬아슬 얼음벽 사이 공중에 매달린 상태다.
위기 탈출에 베테랑인 대원들이 나섰다. 한 명이 우선 손을 뻗어 가까스로 내 오른손을 쥐었다. 홍 대장 목소리다. “침착하세요. 가만히 움직이지 말고 계세요.”고글을 끼고 있어 시야가 한정돼 크레바스의 그 무서운 얼음 틈바구니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의외로 침착할 수 있었나 보다.
얼마 후 생명의 줄이 내려왔고 두 손으로 그걸 꼭 쥐자 몸이 크레바스 밖으로 꺼내졌다. 그제서야 내가 빠졌던 크레바스가 보였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검푸른 얼음 구멍. 폭은 2m도 안 되는데 깊이는 한도 없이 깊었다. 날카로운 얼음벽면엔 살얼음이 찬란하게 눈꽃을 피워 더욱 살벌하게 느껴졌다. 만일 배낭이 걸리지 않았더라면 어디까지 추락했을까.
크레바스에 개썰매의 4분의 1이 걸려 있다. 어서 개썰매부터 끄내고 운행을 이어갔다. 공포는 지금부터다. 떨어질 땐 몰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추락의 순간이 더 실감나게, 또 무섭게 느껴진다. 이번엔 나 혼자 빠졌지만 더 큰 크레바스였다면 개썰매와 함께 더 많은 대원들이 속절없이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이 위험한 곳에 왜 겁도 없이 따라나선 걸까. 몸에 오한이 찾아 들었다.
썰매견 진형을 다시 짜다
(6월 1일 북위 67도 59분 48초, 서경 48도 24분 42초)
지난 밤 추락과 크레바스의 악몽에 시달리느라 눈이 퀭하다. 오전 10시께 개썰매가 출발했다. 예상보다 저조한 속도로 홍 대장이 골치가 아프다. 홍 대장은 이것저것 불필요한 것들을 추스려 다음 보급 때 모두 내보내기로 했다.
부챗살로 펼쳐진 썰매견의 대형도 일부 조정했다. 꾀부리는 놈들을 떼어내 개썰매 옆에 매달았다. 왼쪽 3마리, 오른쪽 3마리다. 힘은 안 쓰고 계속 개 줄을 꼬아 대 운행을 방해하던 놈들이다. 지난 밤 사료를 2배나 먹여서일까. 녀석들이 힘을 낸다. 아무도 없는 설원에 인공의 첫 발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진다.
화이트아웃과 배낭 분실
(2일 북위 67?40분 10초, 서경 48도 19분 06초, 해발 1,449m, 이동거리 41㎞)
어제 운행 때 해무리가 뜨더니 역시 하늘이 꾸물꾸물하다. 숭늉빛 하늘 아래 설원을 질주한다. 오늘도 일부 문제 설매견들을 썰매 옆에 매다는 분산 배치 진형을 짰다. 일단 합격점. 농땡이 치던 놈들이 제힘을 다 쓰기 시작했고 개썰매 속도는 어제보다 조금 좋아졌다.
시야가 많이 흐려졌다. 가스가 차면서 진행된 화이트아웃이다. 하얀 지평선이 선명했던 설원에서 그 지평선이 뭉개지니 느낌이 또 다르다.
질주하던 중 홍 대장이 갑자기 개썰매를 멈춰 세웠다. 배낭 하나가 빈다는 것이다. 엉킨 개 줄을 풀면서 잠지 머물다 급하게 출발하면서 배낭 하나를 떨어뜨렸나 보다. 경황들이 없어 배낭 떨어진 것도 몰랐다. 갈 길이 바쁜데 되돌아 가야 한다니. 홍 대장도 어이가 없는 표정이다. 개썰매는 처음으로 유턴했고, 또 처음으로 설원엔 또 다른 개썰매 자국이 나란히 새겨졌다. 다행히 2, 3km 후방에서 배낭을 되찾았다. 잃은 시간과 거리를 만회하기 위해 홍 대장은 더 자주 썰매견들을 재촉했다.
홍 대장의 회초리 허공을 가르고
(3일 북위 67도 20분 21초, 서경 48도 18분 03초, 해발 1,469m, 이동거리 37㎞)
아침 텐트 밖을 나서니 바람이 거셌다. 썰매견들이 앉은 채 눈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다. 모두 두툼한 하얀 눈옷을 입고 있다.
오늘은 홍 대장이 화가 많이 났다. 좀체 빨라지지 않는 속도 때문이다. 지난 밤 수고했다고 사료를 보통의 2배나 먹여 놓았는데 개들이 처음부터 힘을 쓰려하지 않는다. 홍 대장의 호령 소리는 더욱 격해졌고, 회초리는 허공을 자주 갈랐다(회초리는 직접 개들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공중이나 옆 땅을 때려 소리로 위협하기 위해 사용).
홍 대장의 무서운 독려에 썰매견들이 한데 엉켜 달린다. 서로 몸이 부딪치자 저들끼리도 신경질이 나나 보다. 개 한 마리가 물렸다. 단 한 번 물렸을 뿐인데 다리의 살이 깊게 파였다. 운행이 끝난 후 상처에 약을 발라 주고 붕대를 감아 줬다. 사료에 항생제도 섞었다. 홍 대장도 개들에게 다가가 한 마리씩 꼭 끌어안으며 이날의 수고를 위로했다.
블리자드에 발 묶여 텐트에 고립
(4일 좌표는 전날과 동일)
이른 아침 거센 바람과 눈이 동반된 블리자드가 몰려왔다. 텐트에 눈 부딪는 게 우박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난다. 화이트아웃이 심해 시야가 10m 정도만 확보된다. 개 목에 하네스를 걸던 홍 대장이 텐트로 들어와 잠시 대기하라고 했다. 운행을 나가기엔 너무 악조건이기 때문이다. 마냥 기다리기도 힘들다. 결국 포기. 홍 대장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보고 있기도 곤욕이다. 텐트에 모로 누운 대원들. 누군가의 MP3에서 음악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나 어떡해’가 흘렀다. 홍 대장 얼굴을 쳐다보니 아랫입술이 터져 까맣게 색이 변해 있었다.
거센 눈보라로 눈이 텐트 옆에 높게 쌓이기 시작하자 배영록 대원이 나가 텐트 옆에 이글루처럼 눈을 다져 담을 쌓았다. 바람막이 눈 벽이다. 덕분에 텐트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옐로의 투혼
(5일 북위 66도 59분 57초, 서경 48도 21분 51초, 해발 1,467m, 이동거리 38㎞)
눈도, 바람도 멈췄다. 가스가 남아 화이트아웃은 여전했지만 홍 대장은 출발하잖다. 그제 다쳤던 옐로란 이름의 썰매견이 발목이 많이 부어 있어 목줄을 풀어놓았다. 알아서 개썰매를 따라오라는 배려다. 개썰매가 출발했지만 옐로는 꿈쩍도 안한다. 한 1㎞를 달릴 때까지도 따라오지 않았다. 저걸 어쩐다. 아무도 없는 설원에서 어쩌겠다는 건가. 다시 개썰매를 돌려야 하나 걱정이 앞선다. 한참 후에 하얀 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뚝거리며 옐로가 썰매 자국을 따라오는 것이다.
뒤엉킨 개 줄을 풀고 있을 때 옐로가 도착했고 다른 개들이 앞다퉈 옐로를 반기겠다고 덤벼 개 줄이 다시 또 엉키고 말았다. 옐로는 줄을 묶지 않았는데도 무리에 섞여 함께 달렸다. 개썰매를 끌어야 하는 힘겨움이 있지만 친구와 가족이 있는 그 무리가 옐로에겐 최고의 공간인가 보다. 절뚝거리는 것이 가여웠는데 저렇게 열심히 뛰어 주니 고맙다.
운행 중 하얀 설원에서 새 한 마리를 보았다. 그 어떤 생명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공간이었는데. 작은 새의 날갯짓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그 새는 왜 아무것도 먹을 게 없는 이 허허로운 설원까지 날아들었을까.
예정된 1차 보급 무산
(6일 좌표는 전날과 동일)
허무한 날이다. 1차로 보급이 들어오기로 한 날이다. 어제는 그렇게 화창했는데 새벽부터 다시 블리자드가 몰려왔다. 베이스캠프에서 위성전화로 연락이 왔다. 날씨 때문에 헬기가 뜨지 못한단다. 운행도 힘든 날씨라 또 텐트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오후가 되자 보급 헬기가 내일도 뜨지 못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날씨가 아닌 항공사 예약과 조종사 문제란다. 탐험대 보급이 끊어지면 어떡하냐는 항변에 “탐험을 시작할 때 이미 각오했어야 杉? 여긴 모든 게 척박한 그린란드다”란 답변만 돌아왔단다. 다행히 예비 식량과 개 사료가 있어 조금은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이마저 다 떨어진다면. 배영록 대원이 “며칠 굶는다고 죽지 않는다”며 위로해 준다. 텐트가 점점 감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썰매견들은 탐험을 함께할 우리 대원
(7일 북위 66도 37분 40초, 서경 48도 20분 56초, 해발 1,480m, 이동거리 47㎞)
어제의 블리자드가 어디로 사라진걸까. 화창하게 날이 갰다. 이틀을 한 자리에 머무느라 개 사료와 식량만 25㎏ 가량 줄었다. 하루를 꼬박 쉰 개들도 힘이 났는지 개썰매의 속도는 평소보다 빨랐다.
보급 문제로 오늘 점심은 없다. 초콜릿바도 단백질 가루를 탄 물도 없다. 내일은 꼭 보급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러다 진짜 망망한 설원에서 며칠을 굶고 버텨야 할 지 모른다. 8시간의 쉴 새 없이 진행된 운행이 끝나고 썰매들을 썰매에서 떼어낼 때다. 진이 빠져 바닥에 엎드린 썰매견들이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대원 한 명이 “이 개새끼들”하고 소리를 지르자 홍 대장이 손사래를 치며 “욕하지 말라”고 했다. “개를 개라 부르는데 왜 그러시냐”는 대꾸에 홍 대장은 “탐험을 함께하는 우리 대원들이다. 막 대하지 말라”고 따끔히 충고했다. 홍 대장은 개 한 마리씩 모두 정성껏 쓰다듬으며 “수고했다, 정말 수고했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첫 헬기 보급 성사
(8일 1차 보급)
드디어 1차 보급 헬기가 들어왔다. 이른 새벽부터 마음이 설??? 다행히 날이 도와줬고 예정된 시간에 헬기가 텐트 옆에 안착했다. 오래 보지 못했던 베이스캠프의 동료들을 보니 정말 반가웠다. 탐험대는 다 떨어진 식량과 개 사료를 보충했고 스키 등 필요한 장비를 더 갖추게 됐다. 개썰매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짐을 잔뜩 덜어 놓았는데 그 추려 놓은 짐들을 헬기로 옮겼다. 홍 대장은 그리고 5명이던 썰매 탑승자를 3명으로 줄였다. 사람 몸무게가 가장 큰 짐이긴 했다. 3명의 대원만 가지고 진행한다는 결정이다. 기자와 장성호 다큐멘터리 촬영감독은 기록보단 탐험의 성공을 위해 빠지기로 했다.
단출해진 개썰매가 먼저 출발을 했다. 헬기의 시동이 걸리고 하늘로 오르자 하얀 설원을 가로질러 가는 탐험대가 보였다. 순백의 도화지에 가느다란 개썰매 자국을 길게 늘어뜨리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하얀 설원을 내달리고 있다.
그린란드=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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