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삶과 문화] 미안하다, 고맙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미안하다, 고맙다

입력
2011.06.10 12:01
0 0

집 옆 도서관에서 작업을 하다가 머리가 멍해지면 근처 커피숍에 간다. 갓 볶은 신선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쓰노라면 이런 호사가 없지 싶다. 다만 가게가 작다 보니 손님이 많으면 시끄러워서 글자 한 자 읽을 수가 없는데, 그럴 땐 책을 덮고 내가 모르던 세상의 속내를 듣는다. 가령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딸에게 2,000만 원짜리 의자를 사줬다는 이야기 같은 것. 듣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는데 말 상대하던 사람도 마찬가지였던지, "정말? 200만 원이 아니고 2,000만 원?" 하고 되묻는다. "응, 2,0000만 원. 종일 앉아 있는 애니까 의자가 중요하잖아."

하루 종일 딱딱한 도서관 의자에 앉아 있다가 만성 허리통증을 얻은 나는 의자에 연연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렇지만 2,000만 원짜리 의자까지 이해하는 건 아니다. 의자 하나에 2,000만 원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더 납득하기 힘든 건 그런 의자에서 공부한 사람이 고시에 합격해 판검사가 되는 현실이다. 2,000만 원짜리 의자에서 세상 걱정 모르고 공부만 한 사람이 판검사가 되어, 2만 원짜리도 안 되는 딱딱한 의자에서 간신히 명목뿐인 의무교육을 마친 사람들을 재판하는 세상이라니.

부유하진 않았지만 나는 운 좋게 의무교육을 마치고 한 술 더 떠 대학에 대학원까지 다녔다. 대단찮은 학벌이지만 지금처럼 밥술이나 뜨게 된 데는 그 학벌 덕이 전혀 없다고 할 순 없다. 그래서 이 사회에 고마움과 책임을 느낀다. 그리고 학교 대신 가발공장에 가야 했던 내 초등학교 동창들,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느라 손이 거북 등처럼 갈라졌던 중학교 때 짝꿍에게 미안하다. 대학교는 물론 고등학교, 중학교에도 가지 못한 숱한 그녀들이 없었다면 나는 대학원까지 다닐 수 없었으며 지금처럼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최상위층 자녀는 자사고에 다니고, 상위층은 특목고에, 서민층은 일반고에, 빈곤층 자녀는 전문계고에 다니거나 학교를 그만둔다는 세상에서 판검사가 되었다면, 그것은 아낌없이 지원해준 부모 덕도, 열심히 공부만 한 제 덕도 아니다. 그보다는 뛰어난 재능과 드높은 이상에도 불구하고 가난 때문에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한 친구들, 미친 등록금을 버느라 의자에 앉을 틈도 없었던 친구들이 진작에 경쟁에서 밀려난 덕분이다.

경쟁은 한번도 공정하지 않았고 갈수록 점점 더 불공정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의 성취가 오로지 자신의 재능과 노력 덕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이들이 경쟁을 부추기고 불공정을 심화시킨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신용불량자가 되는 이들이 한 해에만 근 3만 명에 달하는 현실에서, 그들은 이 또한 너희 부모가 경쟁에서 진 탓이니 억울하면 경쟁에서 이기라고 말한다. 그게 세상의 이치고 진리라고.

하마터면 그런 줄 알 뻔했는데, 정말 그들 말대로 세상이 돌아갈 줄 알았는데, 아니다. 못난 어른들보다 현명한 젊은이들이 그들의 어리석음을 꿰뚫어보고 나섰다. 공부를 하기 위해 빚쟁이가 되는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부모의 돈이 자식의 미래가 되는 불공정한 경쟁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수조 원을 쌓아놓고 부동산재벌을 꿈꾸는 대학 재단의 앵벌이 노릇도 더는 하지 않겠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 말을 감당하기 위해 삭발을 하고 점거농성을 하고 거리로 나선 젊은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들 덕분에 세상은 다시 조금 살만해졌으니 이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제는 그걸 고민해야겠다.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