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다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예전처럼 수천의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클라우드라는 새로운 서비스를 선보였다. 온라인 상에 영화나 음악 파일 등을 올려놓고 언제든 휴대용 기기로 이용할 수 있는 이 서비스를 설명하면서 그는 사실상 개인용 컴퓨터(PC) 시대의 종언을 예고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PC를 몰랐을 때 집집마다 PC가 있는 미래를 상상했던 그가 하는 말이라서 그런지 곧 현실로 나타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잡스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성공신화에 많이 이끌리는 것 같지만 그가 기술자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가 만들어낸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변화시킨 것처럼, 기술자가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다.
얼마 전에 출간된 엔지니어 김인성씨의 이란 책을 보면서 기술자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 책의 내용은 국내 IT 업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지만 문과를 나와 인문학에 친숙하고 기계치에 가까운 기자에게는 엔지니어가 세상을 보는 관점에 더 눈길이 갔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진보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잘 만든 한 개의 스마트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을 수 있는 새로운 인터넷 서비스라면서, 새로운 세상은 IT분야의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했다.
이런 말도 했다. 제품과 서비스의 성공이 지속되어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바꿀 정도가 되면 인문학자들은 그것들의 의미와 영향력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신인류의 탄생을 주장하거나,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소통의 욕구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행해지고, 이런 것들이 성공할 수 밖에 없는 학문적 근거가 제시된다.
잡스는 석 달 전 아이패드2를 발표하면서 기술과 인문학의 융합을 강조한 적이 있다.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인문학을 융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잡스는 이 말을 애플 직원들에게는 자주 했던 모양인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술이 주이고 인문학은 종일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문한 탓인지 30년도 더 전에 있었던 한 일화를 최근에야 알게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누군가가 대통령에게 "요즘 사농공상(士農工商)을 공상농사라고 부를 만큼 공업이 중요시되고 있는데, 각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대통령은 "나는 상공농사라고 말하고 싶군요. 아무리 물건을 많이 만들어도 팔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소"라고 답했다.
경제개발에 한창 애쓰던 1980년대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던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 발전에 서울대 법대보다 한양대 공대 출신이 더 공이 크다는 것이었다. 법관, 관료, 정치인보다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실질적으로 국가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난주 우리나라 중ㆍ고교 교과서에 나타나 있는 직업관에 편견, 왜곡이 심하다는 보도가 있었다. 교과서 3종을 살펴보니 가장 자주 언급된 직업이 법관으로 12회였고, 대통령 변호사 검사가 각 6회, 외환딜러는 2회, 기술자는 1회 언급됐다. 세상은 기술자의 손에 의해 바뀌고 인문학자가 그것을 뒤쫓아 설명한다는 말처럼, 교과서는 세상의 변화보다 한참 뒤처져 있는 것 같다. 잡스가 알면 웃을 일이다.
남경욱 문화부 차장 kw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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