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봄'이 시리아에서 다시 고비를 만난 듯하다.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의 열기 속에 시작된 시리아의 민중 시위는 군을 동원한 유혈 진압으로 완강한 벽에 가로막힌 양상이었다. 그러나 7일 지방 마을에서 진압군과 반란군의 충돌로 120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아직 혁명 상황과 거리 멀지만,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댄 시리아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관심을 높인다. 당장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연합(EU) 국가들이 유엔 안보리 차원의 대응을 요구하고 나섰다.
■ 시리아의 민주화 시위는 남부 시골마을 10대들이 학교 벽에 스프레이로 '정권 타도'구호를 쓴 것으로 시작됐다. 시리아는 1963년 이래 모든 정치활동과 시위를 금지하는 국가비상사태를 반세기 가까이 유지하고 있다. 이에 도전한 민주화 시위에 맞서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45) 정부는 8개 도시에 탱크와 병력을 파견해 유혈 진압을 자행했다. 지금까지 민간인 1,000여명이 숨지고, 1만 명 이상이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리아 정부는 희생자들은 무장 폭도와 테러 집단이라고 주장하며, 외신 접근을 봉쇄하고 있어 소문과 추측이 무성하다.
■ 7일 유혈 사태도 진상이 확인되지 않았다. 정부는 무장 집단이 보안군을 공격, 민간인을 포함한 희생자가 생겼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BBC를 비롯한 국제 언론이 주민의 전언을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군의 민간인 학살에 반기를 든 지역 출신 군인들이 시위대에 합류한 '반란'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또 다른 가설은 군이 강경 진압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지역 민병대를 공격한 뒤 '무장 폭도'로 몰았다는 것이지만 설득력은 낮다. 어느 쪽이든, 시위와 진압 양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것으로 짐작된다.
■ 아사드 대통령은 2000년 사망한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의 권력을 이어 받았다. 하페즈 알 아사드는 1970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중동 아랍권에서도 유난한 강권 통치를 했다. 특히 과거 이집트와 함께 대(對) 이스라엘 강경 노선을 주도, 여러 차례 전쟁에 앞장섰다. 또 이란과 더불어 레바논 헤즈볼라 세력을 지원, 이스라엘과 서방에 '눈에 가시'였다. 아들이 승계한 이후에도 다르지 않다. 이에 따라 1982년 종파 갈등이 얽힌 무장 봉기로 2만 명이 희생된 사태의 재발을 점치는 시각도 있다. 이런 국가 분열과 와해는 이라크에서 보듯 이스라엘과 서방에 나쁠 게 없다. 리비아 예멘이 그 길을 앞서 가고 있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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