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탕에서 온탕으로.’
사우나 이야기가 아니다. 테니스 코트의 변신이다. 맨 땅에서 열리는 클레이 대회는 매년 4~5월에 집중돼 있다. 6월부터는 잔디코트 대회가 잇달아 열린다. 첫 무대가 오는 12일까지 영국 런던 퀸즈클럽에서 열리는 남자프로테니스(ATP) 250 시리즈 아르곤 챔피언십이다.
잔디코트 그 자체이자 시즌 3번째 그랜드슬램대회인 윔블던오픈이 20일부터 바통을 이어받는다.
클레이와 잔디코트는 서로 상극이다. 클레이코트는 공이 땅에 닿는 순간 스피드가 줄어들어 총알서브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따라서 랠리가 길게 이어져 강철체력을 앞세운 수비력이 좋은 선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반면 잔디코트는 공의 속도를 그대로 살려 강서버들이 선호한다. 공을 주고 받는 랠리도 휠씬 짧은 편이다. 서브를 넣은 직후 네트를 점령해‘서브 앤 발리’를 구사하는 공격적인 플레이어들이 높은 승률을 자랑한다.
프랑스오픈으로 대표되는 클레이코트는 특정 선수가 독주하는 측면이 있다. 라파엘 나달(스페인)이 그런 경우다. 나달은 클레이코트에서 81연승을 기록했다. 2007년 로저 페더러(스위스)에 의해 82연승이 저지당 한 후 현재까지 45연승을 달리고 있다. 잔디코트 최다 연승은 페더러의 65연승이다. 나달은 복수라도 하듯 이듬해 윔블던 결승에서 페더러의 66연승과 윔블던 41연승, 두 기록 모두 제동을 걸었다. 페더러는 비외른 보리의 41연승에 단 한 경기만을 남겨놓고 땅을 쳐야 했다.
그렇다면 역대 최강의 잔디코트 플레이어는 누굴까.
ATP 홈페이지는 인터넷 여론조사를 통해 ‘잔디코트의 제왕’(Kings Of Lawn Tennis)을 선정하고 있다. 8일 현재 8,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페더러(59%)가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2위는 윔블던 우승 트로피(7개)를 가장 많이 수확한 피터 샘프러스(미국ㆍ29%)다. 페더러는 5월말 현재 잔디코트에서 96승(14패)을 거둬 1973년 ATP가 출범한 이래 최고의 승률(87.3%)을 보이고 있다. 페더러는 지난 6일 프랑스오픈 결승에서 나달에 우승컵을 넘겨준 뒤 “윔블던에서 우승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표시했다.
실제 페더러는 잔디코트와 인연이 남다르다. 그는 2003년 윔블던 정상에 오르며 세계랭킹 1위를 향한 발판을 마련한 뒤 이듬해 ‘테니스 황제’의 장기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페더러는 특히 16개의 그랜드슬램타이틀 중 윔블던에서만 6개를 따냈다. 통산 잔디코트 우승트로피는 11개로 역대 최다 보유다.
여론조사와 달리 2위는 존 맥켄로(미국)가 차지했다. 맥켄로는 잔디코트에서 119승(20패ㆍ승률 85.6%)을 거뒀다. 이어 3년 연속(1978~80)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을 석권한 비외른 보리(스웨덴)가 61승(11패ㆍ84.7%)으로 3위에 올라있다.
잔디코트 우승컵 10개를 쓸어 담은 샘프러스가 101승(20패ㆍ83.5%)으로 4위다. 샘프러스는 “잔디코트에서 하는 경기가 훨씬 편하다”며 “많은 사람들이 잔디에선 서브가 최고의 무기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리턴 서브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윔블던 고지를 3차례 등정한 존 뉴콤(호주)은 “잔디코트 플레이어들은 공수에 걸쳐서 서브 앤 발리에 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들은 한결같이 “클레이 대회가 끝난 직후 곧바로 잔디코트로 무대를 옮겨 경기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테니스계에선 지난 10년 동안 서브 앤 발리 플레이어들이 실종됐다며 2002년 윔블던 결승에서 만난 레이튼 휴이트(호주)와 다비드 날반디안(아르헨티나)은 오직 베이스라인에 공을 꽂아 넣는 경기를 펼쳤다고 비난하고 있다. 뉴콤을 비롯한 테니스 원로들은 “우리가 현역으로 뛸 때는 발리로 상대의 샷을 사정없이 쳐내는 등 매우 공격적인 게임을 했지만 요즘은 이 같은 경기를 보기 힘들다”며 특히 “발리 기술도 과거에는 네트와 거의 닿을 정도의 높이에서 구사하는 고난도의 기술을 선보였지만 요즘은 네트 훨씬 높은 곳에서 구사해 감이 떨어진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수준급 발리 플레이어로 스테판 에드베리(스웨덴)와 패트릭 라프터(호주)를 꼽았다. 샘프러스도 “후배들 중 서브를 넣은 후 네트를 향해 돌진하는 선수를 보지 못했다”며 “가까운 시일 내에 이런 선수가 나오기 기대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편 현역선수들 중에선 페더러에 이어 나달이 잔디코트에서 40승(8패ㆍ승률83%), 앤디 로딕(미국)이 73승(17패ㆍ81%), 휴이트가 101승(24패ㆍ80.8%)으로 뒤를 이었다.
최형철기자 hc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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