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엔조이 더 레볼루션" 해방의 함성 메아리처럼…
무슬림은 금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매주 금요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아랍 국가엔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아잔(adhan)이 경건하게 울린다. "알라흐 악바르, 아시하드 알라 일라하 일라흐(신은 위대하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신 앞으로 나오라는 목소리인 아잔은 올해 들어 해방을 위해 거리로 나서라는 신호로 의미가 바뀌었다. 그리고 피 흘릴 것을 두려워 않는 금요시위는 이슬람 세계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갈급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지난달 27일 이집트 카이로 타흐리르(해방)광장에서 그 열정을 목격했다.
광장으로 가면서 두 차례 여권을 꺼내야 했다. 검문을 한 것은 경찰이 아니라 시위대였다. 축출된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추종자들이 테러리스트를 잠입시켜 시위를 폭력으로 얼룩지게 만들 것에 대비한 검문이다. 경찰과 군은 광장 주변에 얼씬하지 못했다. 시위대는 여권을 확인한 뒤 "환영한다. 와 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광장엔 이집트 국기뿐 아니라 시리아, 예멘, 튀니지 등 민주화 격랑을 함께 헤쳐가고 있는 이슬람 형제국의 국기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대문짝만하게 영어로 쓴 "Enjoy the Revolution(혁명을 즐겨라)!"이라는 글귀였다. 타흐리르광장의 분위기는 축제에 가까웠다. 지난 2월 11일 독재자 무바라크를 끌어내린 후, 카이로 시민은 자긍심 속에서 '호리아 미스르(자유 이집트)'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건 배와 같다.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배를 탄 것이다."
타흐리르광장 바로 앞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는 타랏 카타브(41)는 이날도 문을 닫아야 했다. 매일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던 1, 2월엔 아예 수입이 한 푼도 없었다. 그에 따르면 외국인 관광객수는 예년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회사 경영이 걱정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목소리의 톤을 높여 이렇게 대답했다. "내 회사가 문을 닫아도 상관없다. 이집트 혁명은 중간층이 이끈 혁명이다. 지방의 가난한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면, 아마 이라크처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광장엔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것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손톱이 까만 남자에게 말을 붙였다. 이브라힘 파트리(43)라는 이 남자는 피라미드로 유명한 기자 지역에서 구두를 닦는다고 했다.
"사실 살림살이는 무바라크 시절이 더 나았다. 하지만 그때는 아무도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지금은 하고픈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다."
낡은 히잡(무슬림 여성들이 쓰는 스카프)을 쓴 여린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언어센터에서 아랍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하이다 압델아흐디(29)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순종적인 이슬람 여성의 표본 같은 차림새였으나, 그는 1월 첫 시위 이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금요시위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나는 어퍼 이집트(나일강 상류의 가난한 지역)의 아스완 출신이다. 카이로에 산 지 10년이 됐지만 늘 주눅들어 지냈다. 무바라크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자기 잇속만 챙겼다. 고향의 동생들이 공평한 교육을 받게 될 때까지, 나는 시위를 계속할 것이다."
총탄이 빗발치던 1월의 광장에서, 승리를 믿었냐고 다시 물었다.
"처음에는 무서웠다. 1월 28일까지 내일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29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2월 11일 무바라크는 30년 동안 놓지 않았던 권좌에서 허무하게 물러났다. 그의 권력은 고대의 파라오에 비견되곤 했다. 이날 타흐리르광장엔 그를 돼지로 묘사하며 조롱하는 노래가 울려퍼졌다.
이집트는 다종교 사회다. 무슬림이 인구의 75% 가량을 차지하는 다수이고, 나머지는 기독교인과 유대교인 등이다. 하지만 금요시위 광장에서 그들은 하나가 돼 민주주의를 외쳤다. 니캅(눈을 제외한 얼굴을 가리는 히잡의 일종)을 쓴 여자도, 십자가를 맨 남자도 함께 어우러졌다.
콥틱기독교도인 한나 나게 카멜(47)은 "우리는 지난 1,400년 동안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익혀 왔다. 종교는 달라도 우리는 이집트의 미래를 함께 꾸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슬람 이맘(성직자) 모흐센 모함마드(40)도 "혁명은 알라의 의지"라며 "무바라크에 가장 비판적인 것은 바로 무슬림"이라고 강조했다.
이집트인은 독재자를 쫓아냈다. 시간이 흐르면, 혁명의 함성도 결국 일상의 관성 속에 묻힐 것이다. 그러나 타흐리르광장의 들끓는 젊은이들에게, 혁명 이후에 대해 묻는 것은 아직 이른 듯했다. 대학생 내들 파리드(19)의 목소리는 여전히 흥분돼 있었다.
"우리는 첫 계단을 밟았을 뿐이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고? 우리는 반드시 이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카이로= 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이슬람과 민주주의는 상충? 無知에서 나온 오해에 불과
순나(이슬람의 전통적 규범)와 샤리아(코란을 바탕으로 한 법체계)가 사회 시스템 깊숙이 자리잡은 이슬람 세계에서 민주주의는 꽃피기 어렵다는 생각이 많았다. 길게는 30년 이상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들이 줄줄이 쫓겨나거나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당황케 하고 흥분케 한다. 그러나 이슬람이 민주주의와 상충한다는 것은 무지에서 온 오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많은 이슬람 국가들은 헌법에 이슬람의 정신이 국가의 기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은 신과 지도자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카이로의 한 모스크에서 만난 이맘(성직자)은 그러나 "그 순종은 옳은 것을 따르라는 의미다. 이슬람은 결코 옳지 않은 것을 따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슬람에는 '슈라'라는 것이 있다. 슈라는 주변의 의견을 듣고 독단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폭력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누른 무바라크는 반무슬림적 존재"라고 덧붙였다.
서구 사회가 재스민혁명을 바라보면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와하비즘(이슬람 복고주의)이나 살라피즘(근본적 이슬람 사상)을 표방하는 원리주의 정권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만난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 택배회사 직원인 젠홈 바스(27)는 "나도 무슬림이지만 이슬람의 관습을 강요하는 것은 반대한다. 집권 가능성이 높은 무슬림형제단이 만약 그런 자세를 취한다면, 그들은 무바라크와 같은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역시 이슬람 정당인 엔나흐다의 집권 가능성이 높은 튀니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인 튀니스하이어인스티튜트의 정치학 교수 모함메드 메흐디 아다베흐는 "55년 간 겪어봐서 튀니지 사람들은 이슬람을 내세운 권위주의 정권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새 정권이 만약 복고주의의 길을 걷는다면 혁명은 100% 다시 일어난다"고 단언했다. 그는 "혁명이 진행 중인 나라들은 이슬람 세계 내에서도 세속주의를 일찍 받아들인 나라들"이라며 "제2의 이란이 출현하리라는 시각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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