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프로그램 만들긴 어려워도 간판 내리기는 쉬운 게 한국 방송가의 현실이다. 1년도 못 버틴 단명 프로그램들도 숱하다. 이런 풍토 속에서 한 프로그램이 방송 1,000회를 맞았다면 내놓고 자랑하고 축하 받을 일이다. 그런데 방송사 윗선에서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하며 뭉개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8일 방송 1,000회를 맞은 KBS 1TV '추적 60분' 얘기다. 1983년 첫 방송을 내보냈으니 햇수로는 무려 29년째 시청자들과 만나온 국내 최장수 시사고발 프로그램이다. '추적' 60분'은 뉴스에선 좀처럼 다루지 않는 종교집단 비리나 사회적 이슈들의 이면을 깊숙이 파고들며 PD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구축했다. 최근 날이 좀 무뎌졌다는 비판도 있지만, 시사 프로그램 분야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여전히 작지 않다.
'추적 60분' 제작진은 8일과 15일 특집방송을 앞두고 일찌감치 KBS 홍보실에 기자간담회 개최를 요청했다. 홍보실은 '당연히' 이 요청에 응했다. 지난달 31일 언론사 방송담당 기자들에게 7일 간담회를 연다고 알렸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1일 갑자기 간담회가 취소됐다는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제작진에 무슨 사정이 있으려니 여겼는데, 나중에 들려온 얘기는 "윗선에서 막았다"는 것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방송 1,000회인데… 어떻게든 홍보하려 해도 모자랄 판에 잡아놓은 기자간담회까지 막다니 기가 막히네요." '추적 60분' 관계자는 7일 전화 통화에서 속사정을 캐묻자 "좋은 날을 앞두고 재 뿌리는 것 같아 좀 그렇다"며 말을 아끼면서도 "정말 해도 너무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현 정부 들어 방송사들의 시사ㆍ보도 프로그램 탄압과 규제가 도를 넘었다는 제작현장의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추적 60분' 기자간담회 취소 사건을 가벼운 해프닝으로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 PD는 "간담회 중 KBS의 정권 눈치보기 작태나 4대강편 불방과 관련한 제작진 징계 등 불편한 내용이 불거질 것을 우려해 그런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KBS 홍보실 쪽 해명은 이렇다. "16일 1,000회 기념 리셉션이 잡혀있는데 따로 간담회를 할 이유도 없고, 시사프로그램이 몇 회가 됐다고 간담회를 한 전례도 없다."(한상덕 홍보실장) 간담회 취소를 지시한 강선규 시사제작국장도 8일 통화에서 "간담회와 리셉션 중 선택한 것일 뿐 다른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특집방송 나간 뒤 열리는 리셉션 때문에 사전홍보를 포기한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KBS가 숙원 과제인 수신료 인상에 호의적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각종 프로그램 홍보에 열을 올려온 것과도 상충한다. 전례도 있다. 2007년 3월 열린 같은 프로그램 800회 기념 기자간담회다.
홍보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 정권이 불편해할 프로그램의 잇따른 불방 사태와 이에 항의하는 제작진 징계로 얼룩진 '시사 프로그램 수난시대'와 과연 무관할까. 그렇게 주장하려면 좀 그럴 듯한 이유라도 댔으면 덜 민망할 것 같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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