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 같다, 뱀!”
“우와, 팽이가 스키를 타네!”
구불구불하게 편 클립 위를 자석과 못으로 만든 팽이가 왔다 갔다 한다. 초등학생 20여명이 눈을 떼지 못한다.
“팽이가 클립 위를 왔다 갔다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 강사 최미숙(46)씨의 질문에 한 아이가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팽이에 있는 자석이 못을 자석처럼 만들기 때문에 철로 된 클립을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3일 오후 서울 송파구 장지동주민센터에서 열린 생활과학교실. 아이들은 자석팽이를 갖고 놀면서 자연스럽게 자성(磁性)에 대해 배웠다. 아이들의 눈은 그 어느 수업 때보다 호기심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사람들은 과학이 어렵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배우느냐에 따라 다르다. 생활과학교실을 진행하는 최씨는 딱딱한 교과서 대신 장난감 놀이 같은 실험으로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친다. 그는 스스로를 “과학으로 아이들과 소통하는 아줌마”라고 말한다. 이런 아줌마들 약 1,000명이 전국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특별한 소통에 동행했다.
“나는 아줌마 과학 전도사”
이날 수업 주제는 자석팽이 만들기.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을 놀려 못에 투명 아크릴판과 자석을 끼우고 그 위에 고무튜브를 씌웠다. 번듯한 팽이를 하나씩 손에 든 아이들의 얼굴에는 하나 같이 자신감이 차올랐다.
열한 살 민주는 아크릴판에 곰 토끼 강아지 고양이 등 동물 무늬까지 그려 넣었다. 하지만 민주의 동물팽이는 술 취한 사람처럼 몇 초가량 위태로운 춤을 추더니 이내 쓰러졌다. 민주가 풀이 죽었다. 최씨는 민주의 어깨를 다독이며 팽이 잘 돌리는 시범을 보였다. 그런 최씨의 모습에서 엄마의 마음이 읽혔다.
강단에선 최씨가 아이들을 향해 물었다.
“자석팽이의 못처럼 자석도 아닌 것이 자석의 성질을 갖는 게 뭐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힘차게 답했다.
“자화(磁化)요!”
최씨는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알아? 와, 너희들 혹시 천재 아니야?”
자석팽이와 놀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곧바로 생활과학교실에 온 열 살 경준이는 “선생님이 칠판에 써서 가르쳐 주는 것보다 이렇게 만들면서 배우는 게 더 재미있어요”라며 씩 웃었다.
최씨가 과학 아줌마로 일하기 시작한 건 2006년부터다. 그 전까진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대학에서 수학과 전산학을 복수전공하고 한동안 직장을 다녔지만 결혼과 함께 그만뒀다.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을 조기교육시키는 사커맘과 여러 학원에 태워다 주는 미니밴맘으로 10여년 넘게 살았다. 최씨의 내조 덕에 남편은 사회적으로 점점 자리를 잡아 갔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랐다. 하지만 최씨 자신에겐 남은 게 없었다. 뒤늦게 다시 직장을 구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대학에서 공부한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공을 살릴 길을 찾고 싶었죠. 그러다 주변에서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양성 과정 수업을 추천해 줬어요.”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가 운영하는 이 과정은 결혼 출산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이공계 출신 여성들을 대상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교수법, 과학 실험이나 교구 개발법 등을 가르친다. 3개월 동안 이 과정을 마친 이공계 출신 아줌마들은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방과 후 생활과학교실이나 과학관 등에서 강사나 전시물 해설가, 과학 연극인으로 다양하게 활동할 수 있다.
누구누구 엄마에서 온전한 나로
일요일이었던 5일 경기 과천시에 있는 국립과천과학관. 이곳에서 일하는 아줌마 과학 전도사 이경아(45)씨와 이공계 고교생 3명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만남의 첫 번째 주제는 1층 기초과학관의 전시물인 테슬라코일. 높이 3m 정도 되는 커다란 아령 모양의 테슬라코일은 수백만 볼트의 전압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보여 준다.
“테슬라코일이 작동합니다.”
안내 방송과 함께 묵직한 굉음이 과학관을 메웠다. 바로 그때 학생들은 손에 들고 있던 형광막대를 치켜들었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테슬라코일 가운데에서 번개 같은 섬광이 순간적으로 사방을 향해 뻗어 나갔다. 동시에 형광막대가 주황색과 초록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형광막대 안에서 빛난 물질이 뭔지 아는 사람?”
이씨의 질문에 서울고에 다니는 김희준군이 자신 있게 나섰다.
“주황색은 칼슘, 녹색은 바륨이에요.”
테슬라코일에서 나온 섬광(전자기)의 영향을 받아 형광막대에 들어 있는 칼슘과 바륨의 색깔이 변했다는 이씨의 설명을 듣고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학생들에게 이씨는 선생님이라기보다 멘토다. 이씨는 이들을 포함한 이공계 고교생 15명의 과학멘토를 맡고 있다. 과학멘토를 만난 뒤로 과학관의 전시물과 교과서의 과학 지식이 따로 놀지 않고 연결된다. 아줌마 과학멘토의 역할은 과학관 배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 학생은 “과학멘토와 멘티 관계가 되면 직접 만나거나 인터넷 카페를 통해 계속 과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요. 과학을 재미있게 알아 갈 수 있도록 하는 과학멘토의 조언이 학교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돼요”고 말했다.
과학멘토인 이씨에게 가르침을 받은 고교생들은 이날 오후 봉사 활동에 나섰다. 이번엔 자신들이 과학멘티가 아닌 멘토가 됐다. 과학관을 찾은 어린 초등학생들은 고교생 형들과 함께 놀며 과학을 배웠다.
“제가 고학년 학생들에게 과학멘토가 되고, 다시 고학년 학생들이 저학년 학생들의 멘토가 돼 주는 거죠. 과학을 교과서 밖으로 끌어내고 대중화하는 데 멘토링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풀뿌리 과학 대중화라고 할까요?”
풀뿌리 과학 대중화에 앞장서는 이씨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2008년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수업을 받고 나서 자신이 갈 길이 뭔지를 알게 됐다. 누구누구 엄마로만 불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삶을 되찾은 것 같다고 이씨를 비롯한 과학 아줌마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새로운 과학 문화 출발점
2일 오전 과학 전도사 아줌마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날 한국과학커뮤니케이터협회 주최로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대에서 과학커뮤니케이터 역량 강화 교육 워크샵이 열린 것. 강연자로 나선 구수정(53) 과천과학관 과학교육과 연구사와 함께 과학 아줌마들은 아이들과의 소통 방식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결론은 과학 소통은 쌍방향이어야 한다는 것. 교실에서 교과서로 이뤄지는 과학 교육이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면 교실 밖에서의 과학 교육만이라도 쌍방향 소통이어야 한다는 데 모두들 공감했다.
이날 모인 과학 아줌마들은 조심스럽게 또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바로 과학 창업이다. 생물학 박사 학위가 있는 백승정(39)씨는 “방과 후 과학교실에서 쓸 생물 실험 교구를 개발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생물학 석사인 구미진(37)씨는 “아이들뿐 아니라 학부모를 위한 과학교실도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과학을 가르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업화하겠다는 다부진 결심들이다.
조경숙(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 과학커뮤니케이터협회장은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아줌마들의 활동은 일종의 재능기부”라며 “이들은 아이들에게 과학이 마냥 어렵지 않다는 걸 자연스레 깨닫게 해 주면서 자기 능력을 사회와 나누는 새로운 과학 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 과학 아줌마 출신 백옥경 구미과학관장
4월 경북 구미시에 사는 과학 전도사 아줌마 백옥경(54)씨가 큰일을 냈다. 새로 문을 연 시립구미과학관장 자리를 당당하게 꿰찬 것. 이공계 대학교수나 박사급 연구원 출신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관장 자리에 오랜 기간 전업주부로 지낸 아줌마를 앉힌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던 아줌마가 관장이 된 것도 처음이다. 백 관장이 말하는 성공 비결은 아줌마식 눈높이 소통이다.
“예를 들어 지구 내부가 내핵과 외핵, 맨틀 구조로 이뤄져 있다고 칠판에 써 가며 설명해 주면 아이들은 지루해 하죠. 그래서 분필 대신 찰흙을 썼어요. 색색의 고무찰흙으로 지구 내부 구조를 직접 만들어 보게 하는 거죠. 그렇게 만든 고무 지구를 물에 살짝 삶으면 지우개로 쓸 수도 있어요. 아이들이 필통 속에 그 지우개를 갖고 다니는 동안은 지구 내부 구조를 잊어버릴 일이 없겠죠?”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양성 과정을 수료하고 2009년부터 대구 경북 지역 생활과학교실에서 과학강사로 활동하는 동안 백 관장은 이렇게 이론과 실험이 더해진 자신만의 과학 학습 방법을 창안했다. 암기식 교육으로 과학에 흥미를 잃어 가던 아이들도 다시 재미를 붙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과학 교육은 이론만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가르치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하면 과학이 좋아질까를 항상 고민했죠.”
그의 이런 노력과 성과를 구미시가 인정해 관장이라는 중책을 맡긴 것이다.
“많은 과학관이 관람객들이 그냥 보고 지나치는 장소가 되고 있다는 게 안타까워요. 그런 과학관은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이들이 와서 과학을 마음껏 즐기며 놀 수 있는, 살아 있는 과학관을 만들고 싶어요.”
어려서부터 재미난 과학을 접해야 이공계 기피도 줄 거라는 게 백 관장의 신념이다. 그는 “뛰어 놀며 자신도 모르게 과학을 배운 아이들은 과학에 대한 자신감도 덤으로 얻게 돼요”라고 말했다.
1992년 미국 플로리다대에서 식물분자유전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백 관장은 시간강사로 일하다 둘째 아이를 가지면서 일을 그만뒀다. 10여년 만에 사회로 다시 나온 백 관장은 후배 과학 아줌마들에게 “작은 일이라도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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