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불교를 '침묵의 종교'라고 한다. 상당히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보통 불교 가르침의 방대함을 상징하여 팔만대장경으로 표현한다. 팔만 장의 경판에 새겨진 그 어마어마한 양의 가르침은 출가한 스님들조차 일생 동안 다 읽어보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팔만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듯 어떤 다른 종교나 철학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광대한 가르침을 가진 불교이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경전을 '비유의 바다' 또는 '인류 최상의 문학'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의 가장 발전된 철학도 경전의 가르침과 그 궤를 함께 하고 있으며, 수학과 과학을 전공하는 학자들도 경전의 언어와 논리, 표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의 학문과 연관성을 찾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불교를 침묵의 종교라고 하고 불교인들은 그 말을 수긍하는가.
그것은 불교가 말과 언어, 문자와 표현에 그 가르침의 핵심을 두지 않은 까닭이다. 팔만대장경의 수많은 가르침은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존재일 뿐 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요리책이 요리의 이름과 모양, 만드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도 요리 자체는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쩌면 불교의 경전은 침묵을 요리하는 안내서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실제로 절에 가면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예법이 바로 묵언(黙言)이다.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곧 침묵이다. 침묵은 불교적 삶의 가장 근본 바탕이다. 처음 절에 와서 말을 삼가라는 요구에 많은 사람들이 무척이나 답답해하곤 한다. 말을 하지 않고 어떻게 생활할 수 있느냐고 강하게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사찰생활이 익숙해질 때까지 얼마 동안은 소근거리며 끝없이 대화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루 정도 시간이 지나고 사찰 생활의 흐름을 알게 되면 묵언과 침묵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 간다. 사람들이 하루를 생활하면서 쏟아내는 수많은 말들 중에 참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는 말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체험하게 된다. 다만 하루 정도의 산사 생활을 통해서도 얼마나 불필요한 말들로 하루를 채우고 지내는지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곤 한다. 갖가지 다양한 표현과 비유를 들어 자신의 뜻을 표현한다. 하지만 말은 계속해서 새로운 말을 만들고 이어갈 뿐 끝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말로는 어떤 것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한 모금 시원한 약수의 맛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의 변덕스러운 마음의 변화를 말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다. 말로는 결코 표현할 수 없다. 객관적인 물맛도, 자신의 마음도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자연 현상이거나 사람의 마음이거나 말과 언어, 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히려 말로 인해 실상을 왜곡하거나 오해하게 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다.
실상과 진실은 다만 침묵으로 고요히 관찰하고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진정한 언어는 침묵 속에서 빛을 발한다. 눈빛과 눈빛으로 대화하고, 마음과 마음으로 뜻을 나눌 때 진정 자연과 사람의 본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말없이 앉아 수행에 전념하는 선승(禪僧)은 세상의 아픔과 슬픔을 깊이 느끼며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함께 아파하고 슬퍼한다. 하지만 소통을 크게 외치고 널리 떠들어 대는 저 세상 속의 사람들은 정작 자신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귀와 마음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모른다.
주경 서산 부석사 주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