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간이역 철길 옆에서 한 여인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형사들이 이 여인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1995년 인기리에 방영된 TV드라마 의 한 장면이다. 배경이 된 정동진(正東津)역은 일약 관광명소로 부상했다.
최근 정서진(正西津) 지정 열기가 뜨겁다. 정동진 후광을 기대하는 지자체들의 노림수지만 같은 지명이 범람해 부작용이 우려된다.
인천 서구는 올해 3월 말 “아라뱃길 인천터미널 부근에서 서울 광화문 도로원표를 기준으로 한 정서진 좌표를 찾아 9월 지정 선포식을 갖겠다”고 밝혔다. 구는 특허청에 상표등록 출원을 했고, 인터넷 도메인 등록도 마쳤다. 이달 10일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정서진 상징물 디자인 공모전도 진행 중이다. 구는 세어도 및 향후 조성할 마리나시설 등까지 합쳐 일대를 관광 명소로 만들 계획이다.
이런 인천 서구의 행보에 2005년 만리포해수욕장에 정서진 표지석을 세운 충남 태안군이 발끈하고 나섰다. 태안군은 2007년 허베이스프리트호 기름유출 사고로 자제했던 정서진 홍보를 위해 올해 해수욕장 개장일인 이달 24일부터 2일간 ‘제1회 만리포 정서진 선포식 및 기념축제’를 열기로 했다. 한반도 남한만을 떼어 내면 중원탑이 있는 충주 일대가 중심이고, 이곳에서 서쪽으로 곧장 가면 만리포가 나온다는 게 태안군의 논리다.
그렇다면 지리학적으로 정서진은 어디일까. 국내 지리정보를 관리하는 국토해양부 산하 국토지리정보원은 ‘정답이 없다’고 한다. 기준점이 어디냐에 따라 정서진 위치가 달라지는데, 정형화되지 않은 국토의 중심은 정할 수 없다는 것. 지리정보원 관계자는 “지자체들이 근거로 드는 광화문 도로원표도 우리가 관리하는 게 아니라 맞는지 확신할 수 없다”며 “정동진 역시 광화문에서 정동쪽이 아니라 약간 위쪽에 있다”고 말했다.
기준점에 따라 또 다른 정서진이 나올 수 있어 동일 명칭으로 인한 ‘동반 몰락’의 우려가 높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관광지 지정권은 시ㆍ도에 위임됐고, 2009년 사전조정 권한도 없어졌다”며 “다만 일부 개정 관광진흥법이 시행되는 올해 7월 이후에는 문화부 장관 협의 절차가 부활된다”고 밝혔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