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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10> 이한열 열사와 6·10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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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주일의 小史] <10> 이한열 열사와 6·10 항쟁

입력
2011.06.0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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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 말기인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연세대학교 학생 1천 여 명이 정문 앞에서 경찰들과 대치한 채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규모 병력의 경찰들은 사방에서 학생들을 에워싸기 시작했고 이내 최루탄이 발사되며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학교 안으로 쫓겨가던 학생들 중 한 명이 수평으로 발사된 SY44 최루탄 파편에 맞아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이를 부축하던 학우는 처연한 눈빛에 분노를 담아 진압 경찰들을 응시했다. 이 순간이 한 외신기자의 카메라에 잡혔고 이 한 장의 사진이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낸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됐다. 병원으로 이송된 학생은 한달 여 사경을 헤매다 7월 5일, 22세의 꽃다운 나이에 사망했으니 그가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한열 군이다.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1월에 있었던 박종철군 고문 치사 사건과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자는 이른바 4.13 호헌 조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이를 저지하려는 정권의 야욕으로 인해 서울 도심은 온통 최루가스로 뒤덮였다.

이한열군이 쓰러져 뇌사 상태에 빠지고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가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6월 10일,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재야 민주세력이 총 결집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시위를 전개했다. 대학생과 일반 시민은 물론 여고생과 택시 기사까지 가세한 온 국민의 저항은 6월 내내 계속됐고 마침내 29일, 민정당 노태우대표는 대통령 직선제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시민 항쟁의 주 무대였던 시청 앞 광장이 푸른 잔디를 입고 서울광장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민주화'를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는 지금도 영원하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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