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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깊은 터' 마을에 전기 들어오던 날/ "온 집안 원 없이 불 켜놓게 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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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깊은 터' 마을에 전기 들어오던 날/ "온 집안 원 없이 불 켜놓게 생겼네요"

입력
2011.06.0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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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끊기지 않고 잘 흐르게 해주십시오."

2일 강원도의 한 두메산골에서 독특한 고사가 치러졌다. 사방이 산이요, 들리는 건 새소리밖에 없는 곳에 유사 이래 전기가 들어온 '역사적인' 순간을 축하하는 의식이었다. 고사 지낸 막걸리는 조심스레 전봇대 아래에 뿌려졌다.

강원 정선군 북평면 숙암리 첩첩산중의 '깊은 터' 마을. 5가구 10여명의 주민이 살지만 그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읍내에서 20여㎞ 거리로, 해발 700m 높이에 있어 차를 타고 경사진 흙 길을 따라 10여분 넘게 올라가야 한다.

주민들은 지금까지 양초로 불을 밝히고 장작으로 난방을 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 2시간가량 발전기를 돌렸지만 잠깐 보일러를 작동시키거나 세탁기로 미뤄둔 빨래를 하면 금세 닳았다. 그러니 냉장고나 TV, 컴퓨터 사용은 꿈도 못 꿨다. 생활은 응당 자연의 순리에 따라 해 떨어지기 전에 저녁 밥을 지어먹고 저녁 9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이날 오전 10시, 드디어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다. 주부 이미화(36)씨는 냉장고 문부터 열었다. 음식의 신선함 유지가 아니라 그릇 등 주방 살림을 넣어놓고 싱크대처럼 사용해 온 터였다. 음식을 보관할 수 없어 매일 장을 봐 요리를 해야 했던 이씨는 "전기가 들어와서 가장 좋은 건 첫째도 냉장고, 둘째도 냉장고"라며 "이미 한 달 전에 냉장고를 싹 청소해 놨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씨는 다음달 셋째 아이를 출산한다. 3시간 마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하루 종일 돌보려면 전기는 필수. 한국전력도 이씨의 출산 전에 송전하기 위해 숙암리 초입에서 깊은 터까지 82개의 전봇대를 새로 박아 3.75㎞를 잇는 대공사를 40여일 만에 해치웠다.

아직은 전기 사용이 어색한 모양이다. 이씨는 전기가 들어온 후로도 계속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주민들과 먹을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한참 후에야 전기를 쓸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이씨가 "어머, 내가 왜 불을 안 켜고 요리하고 있었지"라고 말해 희뿌연 부엌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가장 먼저 달려간 곳은 단연 TV 앞. 이씨의 딸 최서연(9)양은 "TV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게 제일 좋다"며 오후 내내 동생 도우(7)와 TV만화 '짱구는 못 말려'를 봤다. 4년 전 귀농한 이기원(54)씨는 "스프링클러 등 농사에 쓰이는 장비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했다.

전기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잃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깊은 터 주민들은 이곳 토박이가 아니라 대부분 시골이 좋아 아무 연고도 없이 귀농한 이들이다. 자연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왔는데 문명에 다시 한 걸음 다가가게 됐기 때문에 살짝 속상하단다.

특히 이씨와 남편 최승현(40)씨는 다니던 금융회사를 그만두고 9년 전 정선으로 들어와, 2009년 전기가 안 들어오는 대신 땅값이 싼 깊은 터에 집을 지었다. 최씨는 "저녁 식사 후 거실에 촛불을 켜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책을 읽으며 대화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며 "행여 전기 탓에 각자 자기 방에만 있게 되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전기가 들어온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이날 밤새도록 집 전체에 불을 켜 놓기로 했다. "온 집안에 불을 환하게 켜 보는 게 소원이었다"며 전깃불보다 더 밝고 환하게 웃었다.

정선=남보라기자 rarara@hk.co.kr

정승임기자 cho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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