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내가 있는 대학원에서 판문점 견학을 다녀왔다. 북한을 공부하는 학생들이니 분단 현장의 체험도 의미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판문점은 남북 공동경비구역으로 특별한 성격을 가진 까닭에 출입허가를 얻어야 되는데 뜻밖에 '탈북한 사람은 출입이 안 된다'는 통보를 받아 일행에서 제외해야 했다. 북한출신 학생들은 정색을 하고 왜 안되냐고 물어보는데, 나로서는 마땅한 답이 없어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탈북자 판문점 견학 막아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온 북한 사람이 2만 명이 넘어서면서 이들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지만 남한 사회의 편견은 여전하다. 한 여론조사에서 남한사람들이 느끼는 거리감은 결혼이주자나 이주노동자보다도 더 멀다는 응답이 다수였다. 탈북 청소년 다수는 일반학교에서 탈락하고 있고, 취업을 위해 '조선족'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일상적이다. 대학에 진학한 탈북자가 신분(?)을 속이고 친구를 사귀다가 북에서 왔노라고 밝히는 것은 과장해서 비유하자면 거의 '커밍아웃'수준의 용기가 필요하다. 몇 년 전에 탈북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를 만드는 과정에서 후보 지역 주민들이 '혐오시설'이라고 맹렬하게 반대하기도 하였다.
미국과 같이 비슷한 환경의 나라에 이민을 가더라도 낯선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기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남한에서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보는 시각이다. 이것은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용어에 잘 드러나고 있다. 공식적으로(법률에 규정한 것) 한때 '귀순 용사''귀순 동포'였고 '탈북자'를 거쳐 오늘날에는 '북한이탈주민'이다.
이러한 변화는 남북관계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에든 이들을 타자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타자화는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따라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남한사람들의 생각은 북한이탈주민은 "양자는 되지만, 사위는 안 된다"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법적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도와 줄 수도 있지만 혈연 공동체에는 넣어 줄 수 없다는 뜻이다.
북한이탈주민의 적응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었다. 따라서 정부의 북한이탈주민 정책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대북정책 전반에서 지난 정부와 '다름'에 목을 매고(?) 있는 현 정권에서는 북한이탈주민 문제도 차별화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이야기하면서 정책을 쏟아내고, 예산도 엄청나게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부의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근본시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이에 토대를 둔 정책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어 걱정이다.
단순히 판문점 입장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간첩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심사기간을 최장 6개월까지 늘렸고, 하나원 교육도 연장하면서 북한이탈주민 지원사업을 안보단체에 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자유의 투사' 혹은 '통일의 고리'로 치켜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빨갱이'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남한사회 적응에 큰 걸림돌
작년에 2,500만 북한주민 지원을 위해 사용한 국가예산의 몇 배를 2만 여명 북한이탈주민을 위해 썼지만, 이것이 정말로 이들의 인권과 궁극적으로 통일을 위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기존 정권과의 차별화나 북한정권 비판을 위한 것이었다면 북한이탈주민들을 타자화를 넘어 도구화하고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현 정부의 대북정책처럼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북한이탈주민이 남한사회에 적응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이들을 타자화하는 사회적 그리고 국가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지난 정권 때는 북한이탈주민도 판문점을 견학할 수 있었다.
이우영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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