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무렵 명동 '문예살롱' 다방에는 저녁이면 주로 '현대문학'과 '문학예술'의 필자들인 시인, 소설가들이 죄다 모여들곤 했었다. 이를테면 신인 소설가로는 이범선, 추식, 곽학송, 오유권, 정한숙, 조금 늦게는 최상규, 이문희 등 그리고 시인으로는 '현대문학' 기자이던 박재삼에 김관식을 비롯, 이형기며 서울대 독문과 출신이던 송영택 등이 노상 들락날락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형기는 박재삼이나 김관식과 같은 나이였지만 헌칠한 체대며 훤한 얼굴 생김새부터 함부로 대할 수 없게 한 급 높아 보였다. 더구나 그는 천상병과 같이 이미 부산 시절의 '문예'지에 추천되었던 시인인데다, 나도 어쩌다가 부산 초장동의 제면소에 직공으로 있으면서 그이의 '고향을 지나며' 라던가 하는 시를 읽고 홀딱 반했던 일이 있어서, 혼자 마음 속으로 존경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형기도 저녁이면 반드시 '문예살롱'에 들르곤 했지만, 어쩐지 그이 쪽에서는 박재삼이나 나를 애송이로 취급하는 것처럼 나에게는 비쳤다. 그야 본인으로서는 그랬을 리가 없다고 펄펄 뛰었을 것이지만, 적어도 그 때의 나에게는 그렇게 비쳤다. 그 무렵 그 '문예살롱'에서 노상 가장 바빠 보이는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이 단편 '독목교'의 작가 곽학송과 바로 이형기였다.
둘 다 노랑색 서류봉투를 끼고 바람같이 들어 왔다가는 어느새 둘만이 사라지곤 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단짝으로 친하여, 다방 안에서도 둘이서만 마주앉아 쑥덕거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같은 동갑내기인 박재삼을 대하는 태도에는 저들만의 은밀한 그 무엇인가가 감돌며 한 문중의 형님이거나 아저씨 대하듯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뒤에야 알았지만 이형기는 진주 출신이었고 박재삼은 삼천포 출신이기는 했다. 그리고 박재삼도 이형기의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고분고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생김새에 어울리게 이미 그때부터 이형기는 서울신문사 정치부에 몸담고 있었다. 그러니 응당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쁘게 돌아가는 사람일 것임에는 틀림 없었다. 그렇게 이형기는 응당 바쁜 몸이어서 바쁘게 돌아가겠거니 하고 십분 이해가 되는데, 곽학송은 가만히 보아하니 쓸데없이 괜스레 바쁜 사람이었다. 무언지 늘 바쁜 척이라도 해야 성이 차는 그런 사람이었다. 서울역 안에서 철도 관계의 4,6 배판짜리 널따란 잡지 하나의 편집을 맡고 있는 모양인데, 하기사 그런 월간 잡지를 매달 꾸려 내자니 나름대로 바쁘기야 했겠지만, 이형기가 바쁜 것 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석이 있었다. 이를테면 조금 웃기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자신도 노상 더 더 바쁜 척이라도 하며 설쳐대야만 이형기와 맞먹는 수준으로 올라설 것이라는 내심의 계산이 깔려 있어 보였다. 하긴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식으로 계산까지야 했을까만은, 거의 무의식이거나 반(半) 의식 속에서일망정 곽학송이 이형기마냥 노상 바쁜 태를 내며 단둘이 마주앉아 쑥덕거리다가는 함께 바람같이 사라지곤 하던 그 모습에는 무언지 모르게 조금 웃기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고, 박재삼도 나와 똑같은 눈길로 그 둘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더러는 박재삼이 두 사람이 금방 나간 쪽을 비시시 웃으며 쳐다보곤 나더러,
"막걸릿 값은 누가 낼꼬?" 하고 물어서 금방 내 쪽에서,
"그야 뻐언 하지. 곽형이"
"그렇지? 그렇지? 이헹도 그렇게 생각허지? 헹펜은 형기 쪽이 몇 배 나을 테지만"
"술값 낼 틈을 곽형이 내주겠어. 으등부등 곽형이 가로맡을껄"
"그렇지? 그렇지? 이헹도 그렇게 생각허지? 어쩜 그렇게 사람들이 죄다 알고 있는공. 그런건 나만 알고 있는강 했는데"
"어림 없는 소리 마. 여기가 어디야? 문학하는 사람 집합소야. 말은 않지만 모두가 죄다 알고 있어. 그런 것에야 달통해 있는 사람들인데"
"그렇지? 그렇지?" 하고 재삼은 둘이 마악 나간 출입문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뭐가 그렇게 재미난다는 것인지 한참을 낄낄대고 웃었다.
나는 그 훨씬 뒤에야 들었지만 그때 이형기는 문단 실력자 조연현의 조카사위였다. 비로소 나도 뒤늦게 혼자 머리를 거듭 끄덕였다. 이형기는 그 뒤 1990년대 들어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고, 곽학송도 홀어머니를 모시고 여러 자식을 떠메고 살다가 말년에는 김포 오두막 집에서 외롭게 처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산다는 게 모두가 타고난 팔자만큼 살다가 가는 것 같다.
이건 그 한참 뒤 1990년 후배 평론가 김현의 상가에 들렀다가 나오던 길에 근처 포장마차에서 다시 소주 몇 잔을 나누던 때의 일이었다.
이형기가 소주 두어 잔을 걸치더니 느닷없이 내 단편소설 '닳아지는 살들' 이야기를 꺼내며, 그 소설 안의 늙은 아버지의 치매에 걸린 의식 부분의 묘사는 그런 식으로 300~400장만 더 썼더라면 세계 단편소설 역사에서 최고의 작품이 됐을 것이라고, 그 점 참으로 아쉽다고 하질 않는가.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자리에는 박재삼도 같이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나로서는 이형기의 이 칭찬이 두고두고 혼자 곱씹게 되며, 글 쓰는 사람들의 서로의 관계라는 것도 참으로 기기묘묘함을 새삼 느끼게 되던 것이었다. 그 몇 년 뒤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랫동안 병마와 싸웠다. 그이의 병환 소식을 듣고 예술원상은 그이가 타도록 나름대로 힘을 쏟았던 일로 그나마 스스로 위로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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