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세계 최강 이탈리아, 포르투갈을 꺾고 4강에 갈 줄 알았던가. 언제 우리가 야구왕국 미국 일본을 줄줄이 제압하고, 불모의 수영 피겨스케이팅에서 박태환 김연아 같은 스타가 나올 줄 상상이나 했던가. 스포츠의 진수는 이런 예측 불가능성이다. 결과가 뻔한 경기에 열광할 이는 없다. 실력이 바탕이지만 기분, 날씨, 장소, 경기장 분위기 등 모든 게 변수가 된다. 미세한 몸동작 차이로 경기 흐름이 단숨에 뒤바뀐다. 스포츠의 불가측성을 수긍케 하는 전제가 공정성이다. 규칙만이 유일한 조건이다.
■ BC 8세기부터 1,100여 년을 이은 고대올림픽 쇠락의 가장 큰 이유는 제우스 숭배 같은 이교(異敎)금지 때문이었지만 이전에 이미 스포츠제전으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도 원인이었다. 로마시대에 들어 금품보상에 집착한 선수들의 승부 조작이 일상화됐고, 황제와 귀족들까지 뛰어들면서 승패는 의미가 없어졌다. 영화 로도 알려진 폭군 코모두스는 요즘의 이종격투기 같은 판크라티온 경기에 직접 출전, 1,000번 이상의 연승기록을 쌓았을 정도였다. 결국엔 반란세력의 비호로 제 기량을 펼친 상대선수에게 목이 꺾여 죽었다고 하지만.
■ 프로축구 K리그의 승부조작 파문이 연일 번지고 있다. 오래 전부터 승부조작이 비일비재했다는 관계자들의 폭로가 도처에서 나오고 있고, 팀플레이 성격상 당장 검찰에 지목된 당사자들뿐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선수들이 관련됐다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13년 전 차범근 감독의 승부조작 주장 이래 다들 아는 일을 그냥 뭉개온 축구계 전체가 사건을 키운 셈이다. 프로야구의 매진행렬을 부러워하는 축구계로서는 만회키 힘든 자충수를 두었다. 1960년대 국민스포츠이던 프로레슬링도 "쇼다!"라는 한마디에 결국 영광의 시대를 접지 않았던가.
■ 작년 미국 프로야구 디트로이트의 투수 갈라리가는 꿈의 퍼펙트기록을 잃고 땅을 쳤다. 26명 타자를 완벽 처리한 9회 말 투아웃에서 마지막 타자의 땅볼도 1루에 정확히 송구됐다. 헌데 판정은 세이프였다. 나중에 오심을 사과하는 심판에게 그는 도리어 '실수를 인정한 용기'를 격려했다. 올 초 MLB가 최고의 스포츠정신으로 선정한 장면이다. 바로 이런 게 스포츠다. 짜고 속고 속이는 행태야 우리가 일상에서 진저리 나게 겪는 일이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건 현실엔 드문, 날것과 같은 순정한 승부 때문이다. 스포츠의 존재이유도 그것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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