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들어 '하나의 유럽'이라는 오랜 생각이 다시 구체화한 건 경제협력을 통해서다. 로베르 쉬망(1886~1963) 프랑스 외무장관은 1950년 유럽 내에서 석탄ㆍ철강산업 분야에 대한 관리권을 초국가적 독립기구에 위임할 의사가 있는 나라들로 공동체를 구성하자고 제창했다. 이게 이듬해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참여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창설로 이어졌다. 쉬망이나, 그에게 적극 동조한 콘라드 아데나워(1876~1967) 당시 서독 총리 등은 이미 그때 유럽합중국에 대한 컨센서스를 가졌다고 한다.
■ '하나의 유럽'은 이후 다양한 지류를 타고 발전했다. 57년엔 로마조약에 따라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출범했다. ECSC와 EEC, Euratom 등 3개 공동체를 발전적으로 통합한 체제가 67년에 출범한 유럽공동체(EC)다. EC의 존속 기간 중 공동 대외정책기구와 경찰 및 사법협력체제가 발전하면서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따라 93년엔 마침내 현재의 유럽연합(EU)이 성립된다. 반면 궁극적 경제통합을 겨냥한 통화체제의 발전은 더뎠다. 99년 유럽통화동맹(EMU)이 출범하고 단일통화의 이름을 '유로(Euro)'로 정했으나, 초기부터 삐걱거렸다.
■ 요컨대 통합의 이상(理想)에 앞서 당장의 경제 현실이 회원국들의 입장을 가른 것이었다. 영국만 해도 다른 회원국보다 높은 금리체계, 유로존보다 미국과의 무역이 큰 사정 등을 이유로 유로 참여에 따른 환율과 금리의 급격한 조정을 원치 않았다. 영국과 함께 덴마크 스웨덴 등도 결국 유로에 불참했다. 독일 프랑스를 비롯해 유로존에 참여한 17개국도 유로 사용에 따른 이익과 위험 사이에서 불안하게 동요하기는 마찬가지여서 결국 유로존은 아직도 태생적 딜레마를 벗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 유로존이 재정 위기에 빠진 그리스 지원책을 두고 또다시 분열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유로존으로부터 1,100억 유로(한화 170조원)를 지원받은 그리스가 추가 구제금융을 요청하자 일부 회원국은 탈퇴까지 경고했다고 한다.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선단은 쇠사슬로 엮어 놓으니 태산처럼 든든했으나, 하나의 불씨로 전체가 잿더미로 화했다. 마찬가지로 한데 뭉쳐 미국을 누를 만한 경제적 파워를 구축하려 했던 유로존이 그리스 같은 경제 취약국 들 때문에 '하나의 유럽'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끊임 없이 기우뚱거리고 있는 것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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