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사람이 찾아들 것 같지 않은 외떨어진 경북 청도군 시골 마을에 수상하게 큰 철가방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다. 코미디 전용극장이란다. 발에 채일 정도로 사람이 많이 다니는 서울 대학로의 코미디 극장들도 자리 채우기가 쉽지 않은데. 이 무슨 무모한 도전이란 말인가. 일을 벌인 사람은 개그맨 전유성(62). 그제야 이해가 간다. ‘다른 건 참아도 식상한 건 못 참는다’는 역발상의 귀재 전유성이기에. 20일 ‘웃고 싶은 놈은 찾아와라. 정 못 오겠거든 자장면 주문하듯 시켜라. 달려가서 웃겨 주겠다’는 기발한 콘셉트의 코미디철가방극장(코철)이 문을 열었다. 개그맨이란 말의 창조자이자 공개 코미디 ‘개그콘서트’를 기획한 그의 개그 인생에서 세 번째 중대 실험이라는 코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개관식 전날인 19일, 의심 반 기대 반으로 그 기괴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어처구니들이 산다
서울에서 출발해 4시간여 자동차로 달린 끝에 코철에 닿았다. 대구 시내에서도 40~50분 차를 타야 한다. 과연 산 좋고 물 좋고 공기 좋다. 이 좋은 자연에 취해 가다 보면 커다란 철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반쯤 열려 있는 철가방에서 간자장 짬뽕이 쏟아져 내리고 젓가락 식초통 고춧가루통에 5m 크기의 소주병까지. 도무지 그냥 지나칠래야 지나칠 수 없다. 협찬을 노리고 제작한 대형 소주병에 ‘참’이라는 지역소주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니 지난해 뽑은 전유성의 극단 코미디시장 2기 단원들이 연습에 한창이다. 객석 한켠, 검은 모자를 눌러 쓴 전유성이 보인다. 다음 날 있을 코철 첫 공연을 위한 최종 리허설 중이어서 날카로운 긴장감이 느껴진다. “인터뷰는 사절이야. 나 말고 단원들 얘기나 좀 듣던지.” 무대 위아래를 분주히 오가던 그는 쌩 어디론가 가 버린다.
잠시 무대 점검 시간, 예닐곱 명이 건물 뒤켠 그늘에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잡담하지마. 웃기는 얘기만해”라는 전유성의 가르침 덕분일까 단원들이 던지는 농도 예사롭지 않다. “아침부터 1만8,000㎉를 섭취 중”이라는 설명근(26)은 과자를 우걱우걱 입속에 털어 넣다 말고 하나 먹어 보라며 기자 입 속에 쏙 넣는다. 외지 사람 보기 힘든 외떨어진 곳이라 그저 누가 오면 반갑단다.
“나무끼리 싸우는 거 봤어요? 여기 있으면 보이는데….” 넉살 좋은 권서강(28)이 눙친다. 시골에서 답답하지 않은지 여기서 뭘 배우는지 물었다. “극단 생활 하면 잘하는 애들끼리 뭉치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는 내가 부족해도 함께 가자고 해요. 당장 방송에서 반짝하는 것 말고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내공을 쌓을 수 있는 곳이죠.” 반장이라는 최고령 단원 박준석(32)이 땀이 송글송글한 얼굴로 말한다. 결연하게 “코미디언 공채에 미련 없어요. 나이가 좀 있어도 먼 미래를 보죠”라고 하자 주위에서들 “그런데 왜 화난 얼굴이야” “눈물 닦아”라고 한마디씩 거든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합숙한 지 세 달째, 슈퍼 한번 가려고 해도 차를 타야 하는 시골 생활에 진력 날 법 한데도 모두 고개를 내젓는다. 마음껏 코미디만 생각하고 배울 수 있고, 게다가 전용 극장까지 생겨 마냥 행복하단다. 자신의 꿈, 그리고 ‘개그계의 대부’ 전유성 이름 하나만 좇아 이곳까지 온 이들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없을 리 만무하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 보였다. 그곳에는 어처구니(상상 밖의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뜻하는 영남 방언)들이 살고 있었다.
들뜬 개관 전야, 잠 못 이루는 사람들
“배우가 재채기를 하면 객석으로 물이 뿜어져. 무대에 비 내리는 장치도 있고. 4D극장이지.” 전유성은 객석 의자에 설치한 구멍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고 했다. “비 오는 무대는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에도 없는 것”이라며 자랑이 대단하다. 뿐만 아니다. 무대 뒤가 커튼처럼 열리도록 해 저수지도, 밤하늘 별도 다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저기 800m 앞에 보이는 당산나무까지, 아니 그 너머도 다 우리 극장이야. 일단 당산나무 아래에 조명을 설치하고, 저기서 배우들이 덩실덩실 춤추면 기가 막히겠지.” 자연이 다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거라는 말에 개그우먼 김미화는 “너무 멋지다”며 감탄을 연발한다. 전유성과 함께 ‘개그콘서트’ 창단 멤버였던 그는 남편과 지인들을 동반해 하루 전날 내려왔다.
주위에서는 휠체어 전용 2석을 포함한 40석 규모의 아담한 공연장에 아쉬움을 표하지만 전유성은 ‘작게 만들어 크게 채우는 게 낫다’는 쪽이다. “크다고 좋은 게 아니야. 100석 만들어서 20~30석쯤 차면 배우들도 공연할 맛 나겠어? 서울에서도 100석 채우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닌데.”
누구를 만나도 데면데면할 것 같은 전유성도 김미화 일행과 소설가 한차현씨, 지리산에서 왔다는 지인 등이 모인 자리에서는 분위기를 주도한다. 저녁을 먹으러 들른 식당에서 한참 밥이 늦어지자 잡담 같은 개그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아니 라디오에 나갔는데 소식을 못 들었는지, 진행자가 말미에 진미령의 ‘아하’ 듣겠습니다 이러는 거야. 난 괜찮은데 PD가 아주 미안해 하더라고.” 아이디어 뱅크답게 일상도 그에게는 모두 개그 소재다. 옆에 앉은 친구를 가리키며 “이 친구가 담근 장아찌가 아주 기가 막혀. 성이 양씨라 내가 그 장아찌 이름을 ‘양아찌’라고 지어 줬어.”
어둠이 내리니 공연장 주변은 가로등도 없어 그야말로 암흑이다. 오후 10시께 다시 공연장에 나타난 전유성은 “그만들 들어가자” 한마디 남기고 지인들과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단원들 누구 하나 공연장을 떠날 생각을 않는다. 전날도 날을 샜다는데 지친 기색도 별로 없다. 이날도 그렇게 새벽 3시까지 리허설은 계속됐다.
조용한 청도가 들썩… 마을 잔칫날 된 개관식
‘왜 청도냐’고 물으면 전유성은 역정을 낸다. 트위터 등을 통해서도 “그냥 왔다”고 수차례 밝혔지만 자꾸들 묻고 또 묻고 해서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가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청도에 들렀고, 2007년 그 길에 버려진 교회를 발견해 개조한 뒤 식당을 차리고 눌러 앉았다. 그렇게 정착해 살다가 오랜 꿈이던 코미디 극장을 개관할 생각을 한 게 전부다.
전유성의 정착 이후 소싸움으로만 알려져 있던 청도가 이래저래 외지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특히 그가 기획한 세계 최초의 반려동물 행사 ‘개나 소나 콘서트’는 유례없는 ‘큰 개판’으로 관심을 받으며 2009년부터 말복마다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들은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관광 자원을 알리고 있다. 이야기를 잘 지어내야 뭐든 팔리는 시대에 최고의 구라를 자랑하는 전유성은 그의 말대로 제대로 된 ‘청도 삐끼’다. 전유성은 각북면 남산리에서 풍각면 성곡리 장기마을로 이어지는 길에 올래길을 패러디한 ‘몰래길’이란 이름을 붙이고, 지역 특산품인 씨 없는 감 청도반시 설화를 지어내기도 했다.
청도군에서 선뜻 코철 건축비 12억원을 부담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청도군 이성언 건설방재과장은 “청도가 어디 붙어 있는 섬이냐고 물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전유성씨 덕분에 홍보가 많이 됐다”고 말했다.
20일 개관식에는 이중근 청도군수와 박만수 청도군의회의장을 비롯한 지역 인사들에다 소설가 이외수씨, 원로 개그우먼 김영하, 개그맨 최양락 엄용수, 인근 주민과 관광객까지 700여명이 참석했다. TV에서 좀체 보기 힘들었던 주병진 김수용도 달려와 축하했다. 외지에서 몰려온 사람들과 취재진으로 조용하던 마을이 들썩거렸다.
좀체 흥분할 것 같지 않은 전유성도 들뜬 모습이었다. 단상에 서 인사말을 하는 그는“코미디를 TV에서만 봤다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공연장이, 특히 지방에 있어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습니다”고 진지하게 얘기했다. 인근 마을에서 왔다는 70대 노부부는 “소문도 많이 나고 뭔가 싶어 구경하러 왔다”며 신기한 듯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관심을 보였다. 들뜬 모습의 중년 부인도 “자장면도 주고, 동네 사람들에게 대접 제대로 하네”라며 기꺼워했다. 이날 코철은 찾아온 손님들에게 자장면 한 그릇씩을 대접했다.
청도 코철이 성공해 전국에 코미디 극장이 생겨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는 걸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전유성의 소망이다. 일단 닻은 올렸고 초반에 아이디어 때문에 관심을 끈 덕분인지 공연 예약은 순풍을 타고 있다. 공연 시간은 평일 오후 2, 5시. 주말과 공휴일은 오전 11시와 오후 2, 5시로 예약을 해야만 볼 수 있다. 개인 예약은 자장면 한 그릇 값인 4,500원이다. 공연 외 시간 주문 예약은 곱빼기 값 7,000원을 받는데 일정 명수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자세한 정보는 코미디 시장 홈페이지(www.comedymarket.kr)에서 얻을 수 있다. (02)703_1950
채지은기자 cje@hk.co.kr
■ 코미디시장은/ 누구에나 개방된 '사관학교'… 신봉선·박휘순 등 배출
오디션도, 수험료도 없다. 하고 싶은 사람 그냥 다 붙여 줬다. 단 선착순이다. 시장에서 물건 팔듯이 웃음을 내다 팔겠다는 뜻으로 전유성이 만든 극단 코미디시장은 방송사 공채에 떨어진 이들, 극단 생활에 회의를 느껴 나온 이들, 그냥 한번 죽도록 코미디만 파 보고 싶은 이들을 모았다. 아니 그냥 저들이 알아서 찾아들었다.
2001년 11월 한 기업의 후원을 업고 1기 63명을 뽑아 운영했으나 3개월 만에 이 기업이 부도를 맞았다. "신인 때 누구 하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한이 맺힌 전유성은 전국에서 모인 제자들을 돌려보낼 수 없어 결국 사비를 털었다. 공연기획팀장을 맡고 있는 김준오 등이 의기투합해 20개월 만에 전 과정을 마치고 수료식을 했다. 신봉선 박휘순 안상태 김대범 황현희 이재형 김민경 등 쟁쟁한 개그 스타들이 1기생들이다.
현재 코철 공연을 위해 합숙 중인 20여명의 단원은 지난해 3월 뽑은 2기생들. 그동안 후배들에게 개그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여건이 안 돼 9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79명으로 출발했으나 중도 포기자들이 속속 나왔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말리다 보니 올해 3월 3일 최종 수료증을 받은 이들은 총 25명이었다. 이후 합숙 중에 또 몇이 나갔다. 연기 연출은 물론 강사를 불러 마술 요가 탭댄스까지 가르치는 정성에 개그 꿈나무들은 상당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 이 극단이 개그 지망생들을 위한 개그 사관학교 격으로 명성이 자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청도=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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