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병과 종군위안부가 자연스럽게 부각되는 공간, 반일정서와 이국적 로맨스가 어우러지는 공간으로서 버마(현 미얀마)라는 이국적 장소가 중요한 관건이었던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는 그만큼 버마 현지 로케가 중요한 문제였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모든 스태프가 가야 하니 비용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제작자에게 "나하고 촬영감독만 가서 몇 부분만 찍어가지고 와서 나머지를 어떻게 해 볼 테니 갈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는 "불가능하다. 도저히 내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그마저도 난색을 표했다.
하여튼 이 작품은 꼭 해야 했다. 고심 끝에 미술 담당 디자이너 박석인과 함께 주한 버마영사관에 찾아가서 협조 요청을 해보기로 했다. "우리가 버마에 대해서 잘 모르니 서적이나 그림 같은 것이 있으면 좀 구해 달라"고 부탁했고, 기꺼이 그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박석인과 둘이서 한 이십일 정도 집중적으로 버마를 연구했다. 도서관에서 버마 사람들의 풍속이나 민족성을 공부했고 버마 원주민 부락을 광릉 숲 속에다가 재현시키기도 했다.
광릉 숲에 버마부락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연히 아열대지방 미장센 구성에 있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열대수였다. 아열대 지방이 아닌 우리나라에 열대수가 있을 리 없었고, 어설픈 세트로 처리할 수도 없었으니 제대로 시작도 해보기 전에 벌써 난감한 일에 봉착한 것이다.
수소문 끝에 어느 유지가 취미 삼아 열대수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한 걸음에 찾아가 부탁을 하니 아니나 다를까 "안 된다"고 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이게 값이 얼만데. 나는 이걸 취미 삼아 지금까지 하나씩 힘들게 구해가지고 이만큼 키워 놓았다"는 게 거절의 변. 거기서 물러나면 이 작품을 제대로 만들 수 없으니 "제가 연대보증을 서서 손상이 되면 그대로 사 드리겠습니다"라고 거듭 부탁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겨우 그를 설득하여 열대수 두 트럭분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화면에 들어오는 곳마다 땅을 파고 열대수를 심었다. 땅을 파서 나무를 심고 다시 들어내고 다시 심기를 반복해야 했으니 스태프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일본군 트럭이 달리는 장면 같은 경우, 지금 같으면 다양한 특수효과를 이용했겠지만 당시에야 아무것도 없었으니, 스태프들이 그 큰 나무들 들고 인물의 앞과 뒤로 뛰고 선풍기로 먼지를 흩날리며 촬영해야 했다.
그렇게 달리는 일본군 트럭에서 배우 윤일봉이 원주민 게릴라 역의 김혜정과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난 이 부분 대사 중 '코리아'를 강조했다. 일제식민지시대의 강제 징용과 종군위안부라는 민족적 비극이 버마라는 제3국의 낯선 땅에서 치러야 하는 전투의 공간적 상징성과 충돌하면서 '코리아'라는 의미와 씨줄과 날줄처럼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 장면이 지닌 중층적 의도를 몰랐다 할지라도 이 '코리아'라는 단어만큼은 관객의 심금을 울렸던 것 같다. 나중에 영화가 개봉한 후 관객들은 '코리아'라는 그 대사가 좋았다고 입을 모았다.
버마라는 공간을 재현해내는 것이 큰 어려움이었던 것 이외에도 전투장면 촬영 중에 겪을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은 다 치러내야 했다. 예컨대 수많은 전투장면에서 실탄을 사용했으니 우리는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영화를 연출한다는 것, 영화 스태프로 일한다는 것이 위험, 그 자체였던 시기다. 특수효과팀은 커녕 특수효과 담당도 없었고, 소도구를 주로 준비하는 소품부에서 필요한 전투장면 관련 장비들을 마련해 놓는 정도였으니 전문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
경험도 전문성도 없는 소품부에 의지하여 위험천만한 장면 앞에 노출될 수 있다는 무모함을 아무리 감안한다고 해도 내게는 그 위험지수가 유난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내 영화의 많은 부분, 중요한 부분이 액션장면이었기 때문이며 특히 전투장면을 세심하고 실감나게 촬영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5)의 경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군이 진격 할 때 게릴라들이 박격포를 쏴서 터트리는 장면을 촬영할 때였다. 터지는 장소에다가 표시를 해 놓고 근처에 가지 말라고 했고, 테스트도 몇 번 한 뒤 촬영에 들어갔는데 결국은 엑스트라 한 명이 그 옆으로 지나가다가 공중으로 떠버리고 말았다. 죽은 것으로 알고 컷도 외치지 않은 채 뛰어 들어가서 그를 끌어안았는데 다 잘려나간 것처럼 보였던 다리가 말짱했다. "괜찮으냐. 천만다행이다"하며 안도를 하는데, 공중에서 떨어지며 내 머릴 치는 뭔가가 있었다. 좀 이상하다 했는데 머리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려왔다. 포탄을 장치해 놓고 돌은 전부 옆으로 치웠어야 했는데 그만 미처 치우지 못한 돌이 공중으로 튀어 올라간 것이었다. 얼마나 멀리 올라갔으면 폭발 뒤 다친 사람을 끌어안고 있을 때까지 돌이 날아올라갔다 떨어져서 내 머리를 내리 친 것이었다. 다행히 내 머리를 조금 비껴나갔지만 열일곱 바늘을 꿰맬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촬영이 진행된 광릉 숲에서 사고가 났으니 비교적 근거리에 있는 광릉 시내까지 가면 병원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광릉 시내에 도착해보니 병원이 없었다. 서울로 나가면 촬영을 중단해야 했다. "무슨 방법이 없냐" 물으니 "수의과 병원이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나마 수의과 병원이라도 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곳으로 가자." 수의과 병원으로 찾으니 수의사가 "웬일이냐?"며 깜짝 놀라 물었다. 자기는 외과의사가 아니고 수의과 의사라고 극구 수술을 거절하며 심지어 마취제도 없다고 펄쩍 뛰었다. "마취제가 없어도 괜찮다. 하여튼 꿰매주기만 하면 돼"라고 하니 결국 마취제도 없이 열일곱 바늘을 꿰매주었다. 그리고 그날 촬영을 강행한 뒤 끝냈다. 고통스럽긴 했으나 무사히 수술도 촬영도 마쳤으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흑야괴객'(1971)의 최호진 촬영감독은 그 힘겨운 촬영여건 속에서 영화를 위해 순직한 '최고 중의 최고'인, 잊을 수 없는 영화인이다. 홍콩 영화사 쇼브라더스에서 골든하베스트로 옮긴 후 첫 번째 촬영한 작품이 '흑야괴객'이었다. 중국 촬영감독을 거절하고 일부러 최호진 촬영감독에게 요청했다. 당시에는 최호진 촬영감독이 정일성 촬영감독보다 더 앞서가는, 열정적이고 학구적인 촬영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호진 촬영감독을 홍콩으로 초빙했고, '흑야괴객' 촬영을 요청한 것이다.
경기 마석에서 자동차 추격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자동차가 카메라 옆으로 달려서 지나가는 장면을 찍는 그 길이 모두 급커브 길이었다. 최호진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대놓고 자동차가 카메라 앞으로 달려와서 빠지는 걸 찍을 때였다. 난 '오케이'를 했는데, 최호진 촬영감독은 "차가 조금 더 카메라 앞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라며 만족하지 못했다. "아이, 됐는데 뭐"해도 그는 막무가내로 예술가 기질을 발휘했다. 최호진 촬영 감독은 조금 더 카메라 앞으로 들어오도록 운전사한테 부탁을 했다. 난 결국 "그래 한 번 더 찍자" 물러났고 최호진 촬영감독 뒤에 섰다.
그렇게 다시 한번 달려오는 자동차 장면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자동차 뒷바퀴가 그만 빠져버려서 갓길로 미끄러지면서 카메라를 쳐버리고 말았다. 최호진 촬영감독과 난 붕 떴다가 둑 밑으로 떨어졌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최호진 촬영감독이 옆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눈에서도 코에서도 귀에서도 피가 흐르는 것이었다. 보통 다른 촬영감독은 뷰파인더를 오른쪽 눈으로 보는 편인데, 최 촬영감독은 왼쪽 눈으로 보았었다. 자동차가 카메라 촬영대를 치고 촬영대가 그의 이마를 치고 말았던 것이다.
얼른 그를 끌어안으니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아서 차에다 옮기고 청량리 큰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런데 중간쯤 가다가 그만 내 무릎 위에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응급실로 데려가서 의사를 부르니 "이미 숨이 끊어졌다"는 말만 돌아왔다. 전쟁도 겪고 수많은 죽음을 보았던 지라 정신 바짝 차려보려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절망감 때문에 오열하고 말았다.
당시에 사용했던 카메라를 오랫동안 보관하고 있었는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기증해 달라 요구하기에 수락하고 말았다. 잠시는 아쉽지만 이제 공식적인 장소에서 여러 사람이 최호진 촬영감독의 체취를 느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그의 고귀한 예술혼에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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