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 넷이 된 친정엄마는 많은 시간을 TV보기로 소일하신다. 이따금 쇼핑을 하거나 맛집을 찾아 다니는 정도가 여가생활의 전부다. 엄마에게 TV는 가족보다 친구보다 더 가까운 동무다. 쇼핑은 물건 사는 재미보다 남대문 시장에서부터 백화점 세일까지 사람 구경, 옷 구경이 더 좋다고 하신다. 맛집은 TV에 소개된 곳들을 여행 삼아 가보고 싶어하신다. 엄마에게는 TV도, 쇼핑도, 맛집도 훌륭한 '구경거리'다.
친정엄마도 현빈이 최고
나와는 30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데, 엄마와 내가 여가를 보내는 방법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한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영화보기가 추가된다는 정도다. 엄마와 다르게 나는 '영화구경'을 다닌다.
영화구경은 좋은 구경거리에 참 특별한 이벤트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고, 극장을 선택하고, 같이 볼 사람을 찾고, 영화관에 가기 위해 외출을 한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는 자연스레 외식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여자들은 영화를 보러 갈 때면 시장 갈 때와는 다르게 옷차림에도, 화장에도 신경을 쓴다.
몇 년 전 가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는 드물게 흥행에 성공한 적이 있다. 자식들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하며 힘들게 노동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한 마리 늙은 소가 주는 감동과 눈물은 참 대단했기에, 엄마에게도 이 영화를 보러 가시라고 했다. 엄마는 정말로 오랜만에 화장에도 옷차림에도 신경을 써서 치장하고 극장엘 가셨다. "참 감동적이지 않냐"고, "너무 슬프지 않냐"고 묻는 내게 영화를 보고 온 엄마의 반응은 예상과 너무 달랐다. 재미없는 영화를 보러 가게 했다고 오히려 역정을 내셨다.
특별한 재미를 기대하고 '영화 구경'을 간 엄마에게 는 시골 노인 두 분의 고된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영화 구경' 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익숙하지 않으셨던 게다. 그런 엄마가 를 보고 싶어 하셨다. 노인들의 사랑, 이순재 할아버지의 헌신적인 사랑에 대해 누군가에게 들으신 모양이다. 엄마가 영화에서 '구경'하고 싶은 것들은 힘들고 고된 노인들의 현실이 아니라, 거짓말이어도 좋은 사랑 이야기였다는 걸 그때야 깨달았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사랑이라는 판타지를 원한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엄마 연배의 배우 이순재보다 드라마 속의 현빈을 더 좋아한다. 30년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빈이 최고인 건 엄마나 나나 똑같다.
누구나 구경을 좋아한다. 구경이 구경답기 위해서는 구경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 '거리'는 보편적인 것들이 아닐까. 개인의 취향과 정서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싸움구경, 불구경, 경치구경, 영화구경에 이르기까지 구경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재미와 감동, 흥분 같은 보편적인 코드이다. 노인들만을 위한 특별한 무언가도 필요하겠지만, 그들이 원하는 구경거리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 같다. 내가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를 엄마도 재미있게 본다.
노인들과 공감하는 능력
어떤 구경거리든 남녀노소가 감동과 재미를 공감하는 공통분모는 분명 존재할 것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오락이든, 그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와 '다른' 그들이 아닌, 나와 '비슷한'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능력은 국민 10명 중 1명이 노인인 고령화 사회에 요구되는 첫 번째 덕목이자, 영화나 드라마 같은 미디어산업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능력이다. 갑자기 여든을 바라보는 나의 친정아버지는 어떤 구경거리를 원하실까 궁금해진다.
김영주 한국언론진흥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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