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식구들이 놀릴 때마다 안 믿는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마음 한편은 불안했다. 특히나 심술궂은 오빠가 주워온 사정을 그럴싸하게 얘기하는데 엄마까지 웃으면서 거들면, 정말이구나 싶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릴 적 이야기다. 사춘기가 되자 아무도 그런 말을 않는데 나 혼자서, 진짜 우리 집은 딴 데 있지 않을까 그리곤 했다. 잔소리 심한 부모님과 만날 심부름이나 시키는 언니오빠 대신, 인자한 아버지, 우아한 어머니, 다정하고 상냥한 형제들이 오순도순 화목하게 지내는 '즐거운 우리 집'을 그리워했다.
다행히 경험과 지식이 늘면서, 즐거운 우리 집이란 환상에 불과하며 다툼이 있다 해서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걸 알면서도 한동안은 일이 안 풀릴 때마다, 부모님이 나를 더 지원해줬으면, 나를 더 격려하고 사랑해줬으면 이렇듯 소심하고 모자란 인간은 안 되었을 거라고 부모 탓을 하곤 했다. 결혼한 뒤엔 남편이 표적이 되었다. 든든한 내 편인 줄 알았더니 언제나'남의 편'인 남편을 원망하며, 그 사람 때문에 우울하고 불쌍해진 내 인생을 가여워했다. 나를 바꾸는 것보다는 남을 탓하는 게 쉬워서 툭하면 원망과 자기연민으로 위안을 삼았다.
하지만 내 인생인데 남들을 핑계 삼는 것도 부끄럽고, 무엇보다 내 부모, 내 남편이기 전에 한 인간인 그들에게 미안했다. 내가 어머니 아버지의 딸로, 남편의 아내로만 살기를 바라지 않듯 그들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부모나 남편이기에 앞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과 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 비로소 내 자신이 보였다.
요즘 심리학이 유행하면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나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의 나를 분석하고 내 문제를 정확히 알기 위해 과거의 충격과 상처를 직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내 문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알고 문제를 해결해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다.
미국 속담에 서른이 넘으면 부모 탓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최소한의 부모노릇도 안 하는 극단적인 경우가 가끔 있지만, 대개는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려고 애쓴다. 한다고 했는데 자식이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부모 탓까지 하면 서운하고 속상하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대개의 자식은 부모에게 잘하려고 애쓰지만 부모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일이 많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타인보다 가족에게 더 가혹한 심사가 문제인 것도 같다.
5월은 어린이날, 어버이날, 입양(싱글맘)의 날, 부부의 날까지, 가정을 챙기는 기념일이 유독 많다. 가족의 소중함을 되새기자는 취지를 모르진 않지만 그런 기념일들이 오히려 가족에 대한 환상과 실망을 부추기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요란한 잔치 분위기에 어떤 아이들은 어린이날 더 큰 상처를 받고, 어떤 부모들은 쓸쓸한 신세를 한탄하며, 그 날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부모와 자식들은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다. 그 때문에 가정의 달이 가정불화의 달로 변질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불화의 빌미가 되는 기념일은 없애면 좋겠지만 만들긴 쉬워도 없애긴 쉽지 않은 게 세상사이니 방법은 하나. 기념일 대신 기념일에 거는 기대를 없애는 것이다. 내친 김에 좋은 부모니 잘난 자식이니 애인 같은 배우자에 대한 기대도 버리고 내 앞의 인연에 감사한다면, 우울하던 마음도 봄날처럼 화사해지지 않을까.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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