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딸’이란 말이 있다.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제 자식처럼 기른 딸’이다. 수양(收養)의 법률적인 용어는 입양(入養)이다. 혈연관계가 아닌데 법률적으로 친자관계(親子關係)를 맺는 행위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낸 오탁번 시인은 수양딸 시인이 많다. 가끔 시 속에서도 등장한다. 오탁번 시인에게 수양딸은 법률적인 친자관계가 아니다. 딸 같은 후배 시인에 대한 애칭이다. 원로 시인에게 시인 수양딸이 있다는 것, 부러운 일이다. 오탁번 시인이 부산에 ‘숨겨둔 수양딸’은 나도 잘 아는 시인이다. 그냥 말이 좋아 수양딸이 아니다. 가끔 만나 ‘부녀상봉’의 즐거움을 함께한다. 그 친구는 오탁번 시인이 부산에 오시면 마치 친정아버지 모시듯 정성을 다해 모신다. 그것이 부러워 나도 수양딸을 두었다. 내 나이에 수양딸은 너무 무거운 이름 같아 ‘詩(시)딸’이라 부른다. 詩딸에게 나는 ‘詩아빠’다. 경남 양산시에서 예쁜 동시를 쓰는 詩딸은 지금은 멀리 사는 내 딸아이와 나이가 같다. 그래서 더욱 정이 가는 詩딸이다. 친딸을 잃고 詩딸을 얻은 셈이다. 대학에서 내게 시를 배우는 또 다른 詩딸은 나를 빼닮았다. 어디 가서 내 딸이라고 소개해도 믿을 정도다. 법률이 아닌, 시로 맺은 인연이지만 착한 딸이 두 명이나 생겼다. 나는 이 인연에 행복하다. 詩딸, 법률관계가 아니라 해도 원하는 것 다해 주고 싶은 내 딸들이다.
시인ㆍ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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