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 한 장…그리움 한 장…사색 한 장… 밤 지새워 '나'를 읽는다
마법의 문처럼 느릿느릿 열리는 도르래 문을 슬그머니 밀치고 들어서는 순간 당신의 시간은 역으로 흐른다. 왼쪽 벽에 걸린 시계는 숫자가 반대로 적혀 있고 보통 시계의 반대 방향으로 바늘이 돈다. 정면 책장에는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판한 80여권의 가 먼저 당신을 반긴다. 당신은 이제 막 윤성근(36ㆍ사진)씨의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상북)에 불시착했다.
밤에 불 밝히는 헌책방
13일 밤 9시40분께 7명의 올빼미족들이 서울 은평구 응암동 한 건물 지하에 토끼 굴처럼 자리잡은 이상북으로 모여들었다. 이곳 주인 윤씨가 바흐의 곡을 틀며 이들을 맞았다. 99㎡ 남짓한 공간, 올빼미들은 제각기 소파와 책장 뒤 구석진 책상에서 1분1초가 아깝다는 듯 책을 읽었다. 책이 빽빽이 꽂힌 책장, 손때 묻은 장난감과 작은 소품들, 오래된 판화 프레스기와 컴퓨터, 빨대와 실로 만든 예술품이 공간을 채웠다. 삭은 종이 향이 코끝에 머물렀다.
올빼미들은 이날을 별러 왔단다. “밤늦게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는데 이날 새벽까지 문을 연다고 해서 손꼽아 기다려 왔어요.” 대학생 이기영(21)씨의 얘기다. 이날 이상북은 새벽 6시까지 심야 책방을 열고 불면의 밤으로 올빼미들을 초청했다. 평소에는 오후 10시에 문을 닫는다. 밤에 조용하게 책을 읽고, 공부하고, 논문을 쓰는 이들을 위해 밤새도록 문을 열어 주자는 넉넉한 주인장 인심이 반영된 것. 주인장은 출출한 배를 움켜쥘 올빼미를 위한 야식도 준비해 뒀다.
이날 밤은 주로 젊은 올빼미들이 많이 찾았다. 대학생, 가수 지망생, 화가, 대학강사, 자원봉사자 등이 이상북으로 모여들었다. 책을 바리바리 싸 온 동네 주민인 대학생 정현준(23ㆍ신학)씨는 “노란 불빛, 촉촉한 실내 공기, 편안한 분위기와 좋은 음악이 어우러져 공부하는 데 적합해 집에서보다 책이 더 잘 읽혔어요”라고 말했다. 싱어송라이터 료운(26)씨는 “서로 상대방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롭게 책도 보고, 공부하고, 글을 쓰고, 소곤거릴 수 있어 좋았어요”라며 씩 웃었다. 2월 기타를 메고 이상북에 우연찮게 들렀다는 그는 간혹 이곳에서 작은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시계가 자정을 가리켰다. 올빼미족들이 하나둘씩 더 모였다. 초등학생 최고은(12)양은 야식으로 제공되는 일식 오차즈케(녹차 우린 물에 말아먹는 밥ㆍ2,500원)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더니 “엄마와 함께 읽을 책도 고르고 야식도 먹으면서 밤 나들이 하는 기분이에요. 노래방에서 친구들이랑 노는 것보다 100배는 나아요”라고 했다. 대전에서 온 주부 이양숙(52)씨는 “사장님이 선별해 놓은 책을 훑어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고, 책에 대해 얘기를 하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헌책방이죠. 이런 공간을 기반으로 마을이나 지역 주민들이 밤늦게도 함께 모여 얘기할 수 있으니 너무 훌륭하고 멋진 일 아닌가요”라고 감탄했다. 동이 틀 무렵에서야 사람들은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 윤씨는 “반신반의하면서 심야 책방을 열었는데 20여명이나 찾아와 줬네요. 마음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도 얼마나 주변에 이런 곳이 없으면 여기까지 왔을까라는 생각에 아쉬움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이상북에 오는 이들 중에는 삶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대기업 IT전문가로 잘나가던 윤씨도 2002년 신발이 가득 찬 신발장을 보고 깨달았다. 자신이 바랐던 삶이 고작 신발이나 많이 가지기 위한 삶은 아니라는 것을. 그길로 사표를 썼다.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책 관련 일에 뛰어들었다. “처음엔 출판사에 들어갔어요. 책이 처음 태어나는 곳이잖아요. 하지만 책을 태어나게만 할 뿐 다른 어떤 의미도 주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새 책보다는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을 그런 진짜 책을 찾기 위해 헌책방 점원으로 일했죠. 근데 책만 쌓아 놓고 관리하지 않은 곳이 많아 결국 직접 책방을 차리게 됐죠.”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2007년 6월 이렇게 문을 열었다. 다양한 의미를 담은 ‘이상’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어 애칭은 이상북으로 붙였다.
처음 6개월은 찾는 손님이 2, 3주일에 한두 명뿐이었다. 월세 등 고정비만 한 달에 70만원. 3년은 계속 적자였다. 하지만 입소문을 타고, 알음알음 손님들이 이상북을 찾으면서 최근 겨우 적자는 면했다.
엄선된 책이 이상북의 문을 계속 열게 해 주는 무기다. 이상북은 ‘내가 읽어 본 책만 판다’는 윤씨의 원칙에 따라 추려진 책만 선보인다. 그는 서울 종로와 동묘 일대 헌책방과 개인에게 1주일에 3, 4번 책을 구매한다. 한 달에 사는 책은 얼추 200~300권. 팔리는 책도 비슷하다. 이상북 책장에는 1972년 전집(백만사 발행), 65년 초판 인쇄한 (휘문출판사 발행)에서부터 (인물과사상사 발행), (살림 발행) 등까지 약 5,000권이 장르별로 깔끔하게 정리돼 있다. 수집가들이 특별히 윤씨에게 부탁한 (샘터사 발행)의 초판이나 마르케스 초기 단편소설을 모은 (민음사 발행) 등도 보인다.
헌책은 추억의 중개자이기도 하다. 최근 70대 노신사는 윤씨에게 젊었을 당시 연애편지를 쓰기 위해 샀던 (창원사 발행)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감정을 간직하고픈 노인의 작은 바람이었다. 윤씨가 어렵게 찾은 책은 수많은 이들의 사랑 교과서였던 것을 증명하듯 곳곳에 밑줄이 쫙 그어져 있었다.
윤씨는 “책방은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좋은 책을 권해 볼 수 있도록 해 주고, 추억을 선사하는 역할도 해야 합니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헌책을 사고파는 헌책방이나 책을 인테리어로 보고 예쁜 책만 진열하는 북카페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얘기다.
작지만 행복한 지역 공동체
16일 오후 5시께 평소 이곳을 즐겨 찾는 이들을 만나기 위해 이상북을 다시 찾았다. 여성 3명이 윤씨와 함께 진지하게 서로 써 온 글에 대한 토론을 나누고 있다. 매달 한 번씩 열리는 글쓰기 모임 멤버인 주부 복은주(41)씨는 “글을 써 발표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동네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라고 말했다. 이상북은 글쓰기 모임뿐 아니라 독립영화나 고전영화 상영, 판소리 등 음악 공연, 청소년 대안공간, 고전 읽기 모임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열고 있다.
윤씨는 책방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지역 공동체가 되길 바랐다. “사람들이 책으로 만나고, 나아가 인간적으로 어울릴 수 있는 사랑방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책방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여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내는 계기를 마련해야죠.”
강지원기자 stylo@hk.co.kr
■ 청계천 골목 신촌 대학가 등서 명맥 잇는 헌책방들
서울 시내 헌책방을 보기가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도 꽤 된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책골목이 형성돼 헌책방들이 주로 들어서 있고, 서울 신촌 등 대학가나 동네 골목 어귀에서도 오래된 책의 향기가 폴폴 나는 헌책방을 볼 수 있다. 특히 주인장의 책 선별 능력과 전통이 배여 있는 이름난 곳은 애서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숨어있는책
출판사 팀장 출신인 노동환(46)씨가 1999년 서울 마포 동교동에 문을 연 곳이다. 다양한 분야의 책이 7만여권 있고, 특히 인문ㆍ사회과학 서적이 많다. 가격은 새 책에 비해 30~50% 저렴하다. 경기 파주출판단지 내에 분점(070_7796_1041)도 있다. 월요일 휴무. 오후 2~10시. (02)333_1041
문화당서점
박상우(62) 대표가 서울 은평구 갈현동 먹자골목 안에 75년 문을 열었다. 경북 문경시에서 박 대표를 비롯 20여명이 상경해 서울 지역에 문화라는 이름으로 헌책방을 운영했는데 현재 남은 곳은 박 대표를 비롯해 3곳. 원서가 많고 희귀한 고문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어 문사들이나 헌책방 사장들이 많이 찾는다. 주요 단골 손님으로는 소설가 최인호, 서예가 윤양희씨,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 등이 있다. 평일 오전 10시~오후 10시. (02)384_3038
공씨책방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다. 약 2만여권을 보유한 국내 최대 규모의 헌책방 중 한 곳으로 희귀한 인문ㆍ사회과학 서적이 많다. 90년 작고한 공진석씨가 운영하던 전통이 있는 곳으로 현재 조카 장화민(50)씨가 운영하고 있다. (02)336_3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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