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장인 제가 나오는 영화라고 해도 애들은 스크린 앞에서 꾸벅꾸벅 졸 겁니다.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12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오월愛'에 주연급으로 등장한 이은재(56) 산돌학교 교장은 매년 5월이면 칼을 쓴 죄인이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뒤 속죄의 길을 선택해 목회자가 됐지만 서서히 그날을 기억 속에서 털어내고 있는 세상과 마주하고 있노라면 낯을 들 수 없는 탓이다. 그는 "5ㆍ18을 기억하는 일은 죄 없이 죽어간 광주 시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며 "언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시치미 떼는 5월이 오면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31년 전 이 교장은 계엄군이었다. 20사단 61연대 3대대 2중대 3소대장이었던 그는 '폭도' 진압 명령에 따라 1980년 5월 어느 날 총칼로 무장한 소대원 40여명을 이끌고 경기 양평군에서 전남 광주로 출동했다. 폭동, 공수부대와 광주시민군 교전 등의 소식을 익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이 트는 광주의 풍경은 낯설었다.
붉은 스프레이로 씌어진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는 문구를 옆구리에 달고 있는 시내버스, 썰렁하다 못해 황량한 거리. '전두환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군인들이 왜… 왜….' 의문은 끊임없이 피어 올랐다.
어린 소대원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라도 해야 할 무렵, 숨이 멎었다. 검은 피를 흘린 시신들이 널린 길거리, 시신 덮은 짚 가마 사이로 보인 앳된 여학생들의 얼굴과 아스팔트에 축 늘어진 까만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피가 거꾸로 돌았다. 덩달아 전두환이 미웠고, 이 사실에 숨죽인 언론들이 싫었다"고 했다.
당시 이 소대장이 맡은 거점은 광주 남구 양림오거리. 광주천만 넘으면 도청에 바로 닿는 곳이었다. 다행히 작전 구역을 지나는 시민은 없었다. 총 쏠 일도 없었다. 그는 "총소리만 들리면 소대원들에게 '대가리 숙이고 꼼짝 마'라고 단단히 일렀던 탓에 시민을 죽이는 일도, 우리가 다치는 일도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광주에서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럽고 시민들에게 미안했습니다."
이듬해 6월 전역한 이 소대장의 인생은 바뀌었다. 평생 자연과 함께 하겠다며 품었던 산림학자(충남대 임학과 75학번)의 꿈을 버리고 신학대로 들어갔다. 그는 "당시 현장을 두 눈으로 본 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며 "목회자의 길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교회도 인간의 고통을 외면했다. 광주를 남의 얘기처럼 했다. "동료들에게 당시 사건의 진상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이 있지 않았겠냐'고 하면서 '성령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리라'는 말만 반복해 회의가 몰려왔죠."
광주에서 철수하면서 "100년이 지나도 씻기지 않을 상처를 입은 광주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터. 덕분에 그는 87년 서울 혜화동에 작은 교회 하나를 개척해 독립했다. 이듬해엔 민주화 운동에 나섰던 교회 모임인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에도 합류했다. 5ㆍ18기념 예배는 물론 관련 단체들과 매년 5ㆍ18기념 행사를 함께 벌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1980년의 광주를 기억할 수 있도록.
2004년 산돌학교 교장으로 와서는 해마다 국토 순례를 하면서 학생들에게 광주를 확인시키는 일도 빠뜨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의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오월愛'가 개봉된 12일 서울 대학로 300석 규모의 한 극장엔 관객이 5명이었다고 하죠? 어린 학생들만 탓할 게 아닙니다."
사회 전체가 광주에 관한 한 치매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 "가해자로서, 피해자로서, 또 방관자로서 광주를 두고두고 기억해야 합니다. 죄 없이 죽어간 그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거니까요."
남양주=글ㆍ사진 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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