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맛쇼’가 빙산의 일각인지 침소봉대인지는 곧 밝혀지겠죠.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게 독립PD인데, 참담한 심정입니다.”
방송사 맛집 프로그램 조작과 출연 대가로 뒷돈이 오간 현장을 고발한 전주영화제 화제작 ‘트루맛쇼’ 논란으로 외주제작업계도 시끄럽다. 13일 만난 한국독립프로듀서협회(독립PD협회) 박봉남 부이사장과 복진오 사무처장은 “협회 회원이 개입됐다면 가차없이 제명하겠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일부 외주사들이 당장 밥그릇만 지키려 하니 영세함을 면치 못하는 거다. 방송사가 제작비를 적게 줬기 때문에 뒷돈을 받았다는 건 양심을 판 거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외주사와 독립PD들이 정상적으로 성장할 수 없게 만드는 방송사의 나쁜 관행을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트루맛쇼’를 연출한 김재환 감독은 최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단순히 맛집 조작만 지적하려던 게 아니라 방송사의 외주사 쥐어짜기의 부작용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고발하고 싶었다”고 했다. 방송사들은 일부 외주사들의 문제일 뿐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방송사도 얼굴에 먹칠을 했지만 결국 불똥은 외주사와 독립PD들에게 떨어졌다.
독립PD협회는 사실관계를 조사하는 한편, 왜곡된 제작환경을 바로 잡기 위해 그동안 방송사에 요구해온 제작자의 촬영원본 사용 권리와 저작권 공유를 강하게 주장할 계획이다. 이들은 “방송사와 제작사가 갑과 을로 머물러서는 서로 발전이 없다”고 강조했다.
-트루맛쇼 논란 어떻게 보나.
박봉남 부이사장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얘기로 들어 알고 있다. 방송사에서는 아니라고만 하지만 찍힌 게 증거지 않나. 함정 논란도 있고, MBC PD 출신인 김 감독이 한국의 마이클 무어가 되려고 하느냐는 비아냥도 있지만 그의 진정성을 믿는다. 독립PD들 중에는 이참에 양심선언을 하고 방송사의 나쁜 관행을 다 끄집어내 장렬히 산화하자는 의견도 있다.”
복진오 사무처장 “아직도 그런 외주사가 있을 줄이야… 분개한다. 일부 제작진의 자질 문제지만, 애꿎은 독립제작사들도 유탄을 맞을 수 있는 상황이다. 협회 차원에서 현재 상황파악 중이다.”
독립PD협회는 독립제작사 소속 PD와 1인제작자 등 800여명이 소속된 단체로 2007년 발족했다. KBS 장수프로그램 ‘인간극장’ ‘VJ특공대’를 비롯해 상당수 교양 다큐 프로그램이 독립PD들의 손에서 나오고 있다. 협회는 미가입 인원까지 하면 독립PD가 2,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독립PD가 처한 환경이 실제 그렇게 열악한가.
박봉남 “제작비 적은 건 사실이다. 그래도 경력이 필요한 업체나 PD들은 손해 감수하고 한다. 직접 뛰어서 정부 부처나 유관 재단 협찬 등 별도 제작비를 더 구해야만 찍을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나마도 협찬을 끌어오면 방송사에서 제작비를 삭감해버리는 게 관례다. 자연다큐 찍는 한 PD는 편당 3,000만원씩 방송사에서 받기로 하고 돈이 모자라 외부 협찬을 받아왔는데, 방송사에서 협찬을 핑계로 편당 제작비를 1,000만원으로 깎아버렸다. 프로그램 더 잘 만드려고 뛴 건데 방송사 좋은 일만 한 거지.”
복진오 “몇 달 일하고도 제작비도 안 나오니 독립PD들 중에는 생활이 안 되는 경우도 많다. 협찬 받아오면 협찬고지료 명목으로 방송사에서 또 떼어간다. 제작비가 넉넉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저작권도 방송사에서 다 가져가버린다.”
독립PD들이 방송사와의 갑을 관계에서 가장 분노하는 부분은 저작권이다. 방송사가 돈을 댄 경우는 물론, 한 푼도 안들이고 외주사 협찬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저작권은 방송사가 갖는다. 촬영원본에 관한 권리 또한 방송사에서 영구 소유하기 때문에 제작 PD는 2차제작물을 만들 수도 없다. 그야말로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고스란히 뺏기는 꼴이다.
-독립PD들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처우가 올라가지 않았나.
박봉남 “방송사들이 아웃소싱 하는 이유는 외주제작 편성비율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싸다는 것 두 가지다. 1억 줄 걸 우리는 3,000만원이면 만드니까. 명품 다큐라고 박수치는 MBC ‘아마존의 눈물’ 물론 잘 만들었지만 우리는 그 제작비로 더 잘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사고 나서 죽어도 아무 보장도 못 받는다. 그게 독립PD들의 현실이다.”
복진오 “박봉남 감독의 ‘아이언 크로우즈(Iron Crows)’는 2009년 세계 최고의 다큐멘터리 영화제로 불리는 국제암스테르담 영화제에서 경쟁부문 중편 대상을 탔다. 개개인의 약진은 있지만 구조적인 문제가 변하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아이언 크로우즈’는 어떤 환경에서 나왔나.
박봉남 “KBS가 2009년 방송한 다큐 ‘인간의 땅’ 5편 중 한편을 재가공해 영화화 한 것이다. 2차제작물인 셈이다. 정연주 사장 당시 글로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을’인 외주사에 획기적으로 촬영원본 권리를 줬다. 해외 판매 수익은 따로 분배하기로 계약했고.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총 5편 제작비 9억원을 KBS가 다 지원하고 딱 하나 해외에 팔 수 있게 영화처럼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서로 윈윈한 케이스다. ‘아이언 크로우즈’는 해외 방송사 10여곳에 판매했고 유럽에서 DVD까지 나왔다. 올 여름 뉴욕 예술영화전용관에서도 상영된다.”
박 PD는 다큐멘터리로는 경이적인 20%의 시청률과 화제를 몰고 온 MBC ‘아마존의 눈물’ 팀을 누르고 지난해 한국프로듀서연합회 대상을 받기도 했다. 자본과 조직의 열세를 딛고 PD들이 가장 타고 싶어한다는 이 상을 독립PD가 거머쥔 쾌거였다. 촬영원본이 KBS에 귀속됐더라면 영화판을 만들 수도 없었을 테고, 콘텐츠는 KBS 창고에서 그대로 처박혀 있을 터. 창작자에게 권리를 주는 게 콘텐츠의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증거다.
-종합편성채널(종편) 선정되면서 처우가 좀 나아지지 않았나.
복진오 “기존 방송사들이 능력 있는 독립제작 연출자들을 빼앗기지 않으려 제작비를 약간 올려주는 등 유화적 제스처를 보이긴 한다. 하지만 저작권 공유처럼 근본적인 조치는 아직 없다. 종편도 지상파와 별다를 게 없다.”
박봉남 “EBS ‘다큐프라임’이 급성장한 건 EBS가 잘한 점도 있지만, 이병순 전 KBS 사장 체제에서 제작비 삭감 등 독립제작자들을 하도 쥐어짜서 대거 EBS로 몰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
-EBS가 최근 저작권 공유 방침을 발표했는데.
박봉남 “EBS가 원본 사용 공유를 발표한 건 혁신적 조치다. 방송사 중에서는 아리랑TV가 올해 봄 ‘을’이 제작비를 조달할 경우 모든 저작권을 을에게 귀속시킨다는 가장 획기적인 안을 내놨다. 능력있는 PD들이 이쪽으로 몰릴 거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기존 방송사 편성 의향서를 받아와야만 지원하던 관행을 해외수출계획 실적 등으로 넓힌 것도 방송을 따내기 위해 고혈을 짜는 구조를 개선할 만한 조치로 기대된다.”
영국 BBC는 외주제작사들이 제작한 프로그램에 대해 5년간 한시적 독점사용권을 갖고, 이후 더 사용하고 싶으면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2년간 사용기간을 연장한다. 독점사용권 행사 기간이라도 계약 내용을 넘어선 용도나 기타 수익은 제작사와 나눈다.
-재방송 수익은 어떻게 되나.
복진오 “케이블에서 인간극장 숱하게 틀지 않나. 그 재방료 다 방송사가 가져간다. 심지어 작가도 성우도 (재방료) 받는데 외주제작사와 PD는 한 푼도 못 받는다.”
박봉남 “파워가 센 방송작가협회는 진작에 개별 방송사들과 협약을 맺었고, 성우들도 방송실연자협회를 통해 받는다. 재방 삼방이 되도 PD들만 못 받는 거다. 단순히 돈 문제가 아니다. 창작자로서 인정 못 받는 설움이 더 크다. 협회에서 앞으로 이 문제를 공론화해 빼앗긴 권리를 기필코 찾아오겠다. 우리도 폭탄들 몇 개 가지고 있다. 방송사들도 각오해야 할 거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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