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쿠데타 50주년을 맞는다. 1961년 5월16일 새벽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당시 예비역이었으나 곧 복귀)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 등 일부 장교들이 군대를 동원해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 5∙16쿠데타이다. 주도 세력은 제6군단 포병대, 해병대, 제1공수특전단 소속 장교 250여명 등 총 3,700명의 장병을 동원해 주요기관을 점령하고 '혁명공약'6개항을 발표했다.
5∙16의 성격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사회과학자들은 한결같이 '쿠데타'로 규정하고 있다. 프랑스어인 쿠데타(coup d'état)란 말 자체가 무력을 기반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는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도 이를 군사쿠데타로 규정했고,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도 이 같은 용어를 썼다. 한국일보는 5∙16 쿠데타 세력의 공과를 재평가하기 위해 이만섭 전 국회의장, 손호철 서강대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 이만섭 전 국회의장 "장면 정부 혼란 극심, 군사혁명 불가피했다"
이만섭(79ㆍ사진) 전 국회의장은 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5ㆍ16쿠데타에 대해 “불가피한 군사혁명이었다”고 규정했다. 이 전 의장은 이날 한국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 극도로 혼란한 무정부 상태였다”면서 이같이 말한 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서로 공과를 인정하고 화합해야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5∙16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그는 쿠데타 직후 만들어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취재하면서 박 전 대통령과 가까워졌고, 1963년 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진출했으나 나중에 ‘3선 개헌’을 반대하기도 했다.
-5ㆍ16을 어떻게 보는가.
“불가피했다. 당시 장면 정부는 너무 무능해 무정부 상태와 같았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
-당시 겪은 경험을 얘기하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당시 기자였던 나는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민주당 신ㆍ구파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국민학생(초등학생)과 경찰관까지 데모하는 지경이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혁명이 일어나면 총리가 목숨을 걸고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당시 장면 총리는 그렇지 않았다. 주한미국 대사관이 문을 열어주지 않자 그는 수녀원에 숨어 버렸다. 그런 리더십으로 나라를 이끌 수 있었겠는가.”
-5ㆍ16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불가피한 군사혁명이었다. 나중에 박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고 장기 집권을 하면서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라는 얘기가 나왔지만 내가 보기에는 군사혁명이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군인들이 나선 것이다. ”
-5ㆍ16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경제를 살리고 민족의 가능성을 찾는 계기가 됐다. 국민에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줬다. 박 전 대통령은 민족 의식을 내세웠고 자립경제, 자주국방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독일에 간호사 등을 보내서 차관을 가져 왔고, 한일회담으로 경부고속도로와 종합제철, 비료공장 등을 만들면서 나라를 살렸다. ”
-과오보다 공로가 더 많다는 의미인가.
“수학 공식처럼 얘기할 수는 없다. 5∙16은 경제 지위를 향상시키고 조국 근대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장기집권과 인권 탄압, 강경 정치는 잘못된 것이다. ”
-5ㆍ16을 어떻게 재평가해야 하는가. 그리고 5ㆍ16이 남긴 그림자의 극복 방안은.
“승계와 단절이 필요하다. 경제를 건설하고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킨 점 등은 승계해야 한다. 하지만 장기집권에 따른 인권탄압 등은 단절해야 한다. 민주화 세력은 산업화 세력의 경제 건설 등을 인정하고, 산업화 세력도 민주화 세력이 억울하게 탄압받은 것 등을 인정해야 한다. 서로 잘한 것은 인정하고 잘못은 반성하면서 화합해서 선진국을 만들어야 한다. ”
고성호기자 sungho@hk.co.kr
■ 손호철 서강대 교수 "4·19 혁명정신 압살, 산업혁명 評도 착각"
손호철(59 ∙정치학)서강대 교수는 15일 "5ㆍ16 쿠데타 세력은 형식적으로 4ㆍ19 혁명 계승을 말했지만 내용적으로는 4ㆍ19 정신을 물리적으로 압살했다"면서 5ㆍ16 쿠데타를 비판했다. 5ㆍ16을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이룬 경제성장에 대해서도 그는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이 60년대에 시작됐다고 보는 건 착각"이라고 주장했다.
_5ㆍ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소수의 군부 엘리트가 무력을 사용해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내용 면에서 봤을 때 4ㆍ19 혁명 이후 나타났던 교원노조 운동, 남북평화통일 움직임 등 민주주의 열망을 물리적으로 압살했다. 5ㆍ16 쿠데타와 4ㆍ19 혁명은 정반대에 서 있다."
_환영하는 대중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 아니냐"는 주장도 있는데.
"혼란을 싫어하는 안정세력, '빵'을 바라는 일부 서민들이 반기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군이 사회에 뛰쳐나와야 할 정도로 혼란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정군(整軍)운동을 했다가 밀려난 군인들이 옷을 벗고 나가야 했던, 군 내부적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장면 정권은 반공법, 데모방지법을 추진했었다. 빠르게 권위주의체제로 가고 있던 장면 정권을 통해서도 당시 혼란을 해소할 수 있었다."
_5ㆍ16 이후 경제 성장에 대한 평가는.
"'1950년대 경제는 정체됐고, 5ㆍ16 이후 경제발전이 시작됐다'는 건 착각이다. 50년대 한국 제조업 성장률이 연평균 16.8%였다. 당시 개발도상국 평균은 5%였으니 세계 평균의 3.3배 가량이다. 1960~70년대 한국의 연평균 제조업 성장률은 20% 가량인데, 세계 평균의 3배 남짓이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50년대가 더 나은 성적이었다."
_'경제는 발전시켰지만 민주주의 억압은 문제였다'는 식으로 정리하는 시각이 있는데.
"국민 동의를 구하지 않고 억압적 방식으로 성장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유린한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게 이룬 경제성장 자체도 많은 한계를 보여줬다. "
_경제 성장 과정에 드러난 문제점은.
"대외 의존형 종속적 경제, 대기업 위주의 저임금 양극화, 관치 경제 등이다. 이런 게 1997년 한국 금융위기의 원인(遠因)이 됐다. 97년 위기 이후 '박정희 향수'가 퍼지는 게 아이러니하다. 박정희 정권이 남긴 가장 큰 병폐는 '결과가 과정에 앞선다'는 결과 지상주의의 보편화이다."
_5ㆍ16 쿠데타가 미국의 작품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렇게 보진 않는다. 미국은 장면 정권이 무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5ㆍ16세력과는 다른 그룹을 이용한 쿠데타를 준비했을 수는 있다. 5ㆍ16세력은 반미는 아니어도 원미(遠美) 성향이었다. 미국도 당초 이들을 진압하려다 후에 '관리'로 방향을 틀었다."
진성훈 기자 bluejin@hk.co.kr
■ 쿠데타 주역들 행로
5ㆍ16 쿠데타 주역들과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사들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들은 대부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그들은 1979년 유신체제가 몰락할 때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지만 그들의 말로(末路)는 불행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18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하면서 경제성장과 독재라는 빛과 그림자를 남긴 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김종필(JP) 전 총리는 처삼촌인 박 전 대통령과 함께 쿠데타를 주도하면서 정치권에 등장한 뒤 '박정희 정권 2인자'로 활동했으나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재산 환수의 수난을 겪었다. JP는 1987년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한 뒤 대선후보로 출마했으며 1990년 '3당 합당', 1995년 자민련 창당, 1997년 '김대중-김종필(DJP) 연합'등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이어갔지만 2004년 17대 총선에서 자민련이 참패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2008년 12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지만 후유증을 겪고 있다. 그는 쿠데타 50주년을 앞두고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5ㆍ16은 조국 근대화의 출발점이 됐다"고 말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혐의로 이듬해 사형에 처해졌다. 김 전 부장은 5ㆍ16 당시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아 일시적으로 감금됐으나 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풀려나 쿠데타 세력을 적극 도왔다.
5ㆍ16 직후 박정희 소장 좌우에 포진해 사진을 찍어 유명해진 박종규(당시 소령)∙차지철(당시 대위) 전 대통령 경호실장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유신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바탕으로 권력 2인자의 자리에 올라 철권을 행사했던 차 실장은 10ㆍ26 현장에서 김재규 전 부장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1963~69년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 중 정치공작으로 악명을 떨쳤던 김형욱씨는 퇴임 후 미국으로 망명해 유신정권을 강력히 비난하다 79년 프랑스 파리에서 갑자기 실종됐다. 그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으나 사인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는 육군 중령으로 5ㆍ16에 참여했다. 5ㆍ16 당시 장면 총리 직속의 정보위원회 연구실장이었으나 나중에 쿠데타 세력과 미국의 관계 개선에 앞장서 5ㆍ16 세력에 합류했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은 2009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5ㆍ16 민족상 이사장을 맡은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 오치성 전 내무장관 등 다른 5ㆍ16 주역들도 일찌감치 정계를 은퇴, 조용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유인호 기자 yi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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