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에 웃고 돈에 운다. 이 놈의 돈 때문에 벌어진 일들을 죄다 모으면 여러 권의 책으로도 모자랄 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18일 시작하는 화폐 특별전에 나오는 돈들도 사연이 참 많다. 성형외과 의사 정성채(79)씨가 평생 모아서 1992년 이 박물관에 기증한 화폐 2,800여점을 선보인다. 한국 최초의 주화인 고려 시대 건원중보를 비롯해 조선 시대,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발행된 화폐까지 한국의 화폐를 거의 총망라했다. 화폐로 본 한국사라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사연과 역사를 지닌 화폐들을 볼 수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초상이 박힌 500환권 지폐는 독재의 우스꽝스런 에피소드를 지니고 있다. 57년 발행 당시 초상은 지폐 중앙에 있었으나 돈을 접을 때 감히 국부(國父)의 얼굴이 접히는 게 불경하다 해서 59년 새로 찍으면서 오른쪽으로 옮겼다.
한국 돈에 여성이 처음 등장한 것은 62년 발행된 개갑100환권 지폐다. 엄마와 아들이 통장을 쳐다보고 있다. 당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던 정권이 저축을 독려하려고 만들었다. 이 돈은 3차 화폐개혁으로 겨우 20일 유통돼 해방 후 화폐 중 가장 단명했다.
72년부터 80년 12월까지 발행한 5000원권 지폐의 이율곡 초상은 서양인 얼굴이었다. 당시만 해도 화폐를 찍을 기술이 없어 영국에 맡겨서 찍은 이 돈에는 ‘서양 율곡’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77년에야 한국인 율곡으로 바뀌었다.
대한제국 시기의 화폐는 외세의 각축장이 돼 버린 당시 상황을 보여 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뺏기기 직전 대한제국이 발행한 은화에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독수리 문장이 박혔다. 일본제일은행이 일본인 초상을 인쇄해 발행한 지폐도 그 무렵 유통됐다.
돈이 백성들 등골 빼먹은 내력도 볼 수 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비용을 마련하려고 찍어낸 상평통보 당백전이나 대한제국이 발행했다가 나중에 쓸모가 없어지자 일본인들이 위폐를 만들어 조선 농민을 울렸던 이전오푼 백동화가 그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별전(別錢)도 나온다. 별전은 복을 비는 마음을 담아 돈 모양으로 만들어 쓰던 것으로 박쥐 나비 열쇠패 등 여러 형태에 다양한 문양을 박고 술을 달아 치장했다. 그 중에도 열쇠패 모양의 별전은 상류층의 인기 혼수품이었다.
이 화폐들을 기증한 정씨는 해외 출장길에 외국 화폐를 모으다가 취미가 돼 한국 화폐를 모으게 됐다고 한다. 그가 기증한 2,800점의 화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유물 10만점 중 3%를 차지하는 방대한 양이다.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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