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지금의 시점에서 세계화는 세계사적인 전환을 나타내는 현상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사람의 삶의 큰 틀을 이루고 삶의 작은 움직임과 사람의 마음가짐에도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사람의 나날의 삶은 그때그때의 작은 일들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일들을 규정하는 큰 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것과 큰 것은 하나로 짜인 나날의 삶의 바탕이 될 뿐, 정상적인 상태에서 그것은 뚜렷하게 분리되어 의식되지 아니한다.
문학은 구체적 삶의 이야기
걸어 다닐 수 있는 동네의 범위 안에서 산다면, 그때그때의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이 삶의 일이 된다. 그러면서 의식의 밑에 동네가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움직여 다니는 물질적 환경 또는 공간이다. 조금 더 추상적으로, 그것은 이웃, 토지, 밤과 낮, 그리고 계절의 순환을 이루는 삶의 질서이다. 다시 그것은 천지(天地)의 이치 그리고 그것을 관장하는 초월자에 대한 믿음으로 승화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일찍이 과학 기술의 발달, 산업 조직의 합리화, 시장의 확대가 자본주의를 범세계적인 현상이 되게 함으로써 전 근대의 사회조직과 세계 인식을 파괴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모든 단단한 것은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는 비유로 이것을 표현한 일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삶에서 구체적인 지표가 되는 작은 규모의 사회 제도와 믿음들이 사라지는 19세기 중반의 현상을 말한 것이지만, 오늘의 세계화 속의 삶에 그대로 맞아 들어가는 비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치이론가 마셜 버만은 끊임없는 파괴와 갱신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삶을 설명하고자 한 저서의 제목으로 이 말을 사용한 바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그리고 그에 연결하여 정보기술의 발달은 사람의 삶을 바르게 알기도 어렵고 제어하기도 어려운 추상적 체제가 되게 한다. 이 체제 속에서 개인의 삶, 일, 사람과 사람을 맺는 공동체, 이러한 것들은 구체적인 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금전과 경제,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관료 체제의 기능으로 재정의된다. 이 추상화 또는 비인간화에 대응하려는 방안들도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것들도 이데올로기와 집체적 당위성으로 삶의 현실을 단순화한다. 그런가 하면, 개인의 삶의 진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윤리적 기초를 말하는 것은 거짓의 수사(修辭)가 된다.
문학의 이야기는 언제나 구체적인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여러 사람의 이야기이고 사람을 넘어가는 세계의 이야기이다. 세계화의 시대에서 사람의 진실한 느낌과 이야기는 어떻게 표현되는가? 밖에서 찾아오는 이방인을 위한- 제 고장에서도 이방인이 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을 위한, 보편 윤리는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가? 경제적 풍요의 약속과 탐욕 속에 인간과 자연의 참모습이 그대로 지속될 수 있는가? 의지할 수 있는 단단한 것들이 없어지는 세계에서 사람은 어떻게 중심을 잡고 살 수 있는가? 문학은 세계시장 속에서 상품으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인가?
서울국제문학포럼의 문제 의식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 제 4회 서울국제문학포럼 조직위원회가 제안한 주제인 '세계화 속의 삶과 글쓰기' 는 이러한 문제들을 종합한 것이다. 국내·외에서 참가하는 문인들의 이야기가 위에 열거한 질문들에 직접적으로 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의식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 깊이에 놓여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들의 여러 이야기들은 분명 세계화 속의 사람의 삶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김우창 이화여대 석좌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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