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인’(1953)에서 템포와 몽타주를 배우다
초창기 한국영화는 주로 일본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소위 ‘신파(新派)영화’라고 하는, 대사 위주의 템포가 느린 멜로드라마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미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관객들이 빠르고 웅장한 할리우드영화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한국영화 초창기를 관통하며 영화감독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던 나는 ‘이거 어떻게 해야 관객을 되돌릴 수 있겠나’하며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하고 싶었던 영화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닥터 지바고’ 같은 스펙터클한 작품이었지만, 우리나라 제작 여건상 그런 초대형 대작은 도저히 불가능한, 꿈 같은 일일 뿐이었다. 그 점은 예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영화를 공급하는 시스템, 영화를 소비하는 시장 규모 등 영화의 산업적인 면에서만 보더라도 규모의 경쟁력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1950~60년대를 말해 무엇하랴. 한계가 분명한, 주어진 환경 내에서 창조적이어야 했고 새로워야 했으며 저예산이어야 했고 한국관객의 발길을 끌어들여야 했다.
‘지금은 모두 가난하고 암울한 시대니까 뭔가 활력을 주는 작품을 해야 되지 않겠나’라며 고심하던 차에, 마침 조지 스티븐슨 감독의 ‘셰인’을 보게 되었다. ‘셰인’은 미국 서부극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수작이었고, 서부의 역사를 통해 서부극의 역사까지 껴안고 성찰한 자기반영적인 명작이었다. 당시 할리우드 대작 영화에 비해 소규모·저예산 영화였는데도 불구하고 소년의 눈을 통해서 어른 세계를 바라보는 시점과 영화 형식에 담긴 서사시적 내용은 잔잔한 감동을 주기에 손색이 없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빠른 편집과 템포였다. 통상적으로 당시의 서부영화라고 한다면 보통 총 싸움과 정형화된 스토리 정도 밖에 생각 못하는데 ‘셰인’은 몽타주 기법을 사용하여 박진감 넘치는 총격전, 속도감 넘치는 격투 장면을 표현했으며 그런 새로운 형식에 강하게 대비될 만한 서정적이고 서사시적인 내러티브(narrative)를 잔잔히 그려내고 있었다. 이런 비견될 만한 형식과 서사적인 완성도를 통해 감독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나 주제의식을 모두 전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영화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소규모와 저예산에도 불구하고 빠른 템포와 완성도 높은 주제의식으로 감명을 준 ‘셰인’을 통해 난 하나의 새로운 목표를 발견한 것이다.
‘아, 우리나라 영화도 이제 이렇게 가면 되겠구나.’ ‘셰인’을 반복해 보면서, 빠른 템포의 편집을 어떻게 했느냐를 연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요새처럼 비디오나 디지털 장치가 있는 시대도 아니니 반복 관람과 함께 분석하며 영화연구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촬영기사에게 극장에서 ‘셰인’을 찍어오라고 했다. 그런데 영사기 속도와 카메라 속도가 일치가 되지 않으니 영화를 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단성사 사장을 찾아가서 부탁했다. “필요한 몇 부분만 좀 빌려주면 좋겠다”고 요청하니 곤란한지 그는 겸연쩍게 웃기만 했다. “이거 하나 없어지면 우린 망한다”는 게 그의 답변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부탁하자 “그건 절대로 못 빌려준다”고 그는 단호히 거절하고 말았다. 그냥 물러설 수 없어 또다시 매달려 부탁했다. “몇 권(영화 한 편을 구성하는 여러 필름 통에 대한 지칭)만 빌려 주십시오. 그러면 밤에 가서 연구하고 내일 아침까지 돌려 드리겠습니다.” 결국 그 분은 내 열의에 감복했는지 결국 마음을 받아 주었고 필름을 빌려주기로 했다.
편집실에서 밤새워가며 수없이 반복해서 보고 분석하고 연구했다. 물론 조감독들 모두 불러놓았다. “옆에서 봐라, 너희들”하며 그들을 독려해 함께 연구하여 스티븐슨 감독이 커트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분석했다.
이렇게 ‘셰인’은 나, 정장화의 액션영화에 대한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옳지, 나는 이 방향으로 간다. 한국 감독들이 아무도 이를 시도하지도 않았고 액션영화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불모지니까 내가 이 기틀을 마련해야 되겠다.” ‘셰인’을 통해 액션 영화 연출의 길에 들어선 계기가 된 것이다.
액션영화란 스피드와 리드미컬한 템포, 몽타주 기법이 생명이다. 돌이켜보면 스피드와 리듬 그리고 몽타주에 빠져든 것이 어쩌면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학 2학년까지 음악공부를 했다. 영화 속에서 음악적 요소를 찾아내고 발전시키는데 흥미를 보이는 것은 내 삶의 궤적이 가져다 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셰인’으로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된 뒤 본격적으로 액션을 영화에 도입한 작품이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이다. 이 영화는 이후에 ‘빠른 이야기 전개와 흥미로운 상황 설정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내 액션영화 연출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로 기록된다.
1950년대와 60년대 畸뮌?굉장히 가난했고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고 싶어도 할 곳이 없었던 암울한 시기였다. 나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기 위해서 ‘시원시원한 영화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박진감 있고 템포 빠르고…. 그러면서도 메시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거듭했다. 결국 그 다짐을 ‘햇빛 쏟아지는 벌판’을 통해 실현 한 것이다.
어느 일곱 살짜리 어린이가 전쟁 중에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는다. 전쟁 중이므로 현찰이 아니라 금궤를 포함한 현물이다. ‘햇빛 쏟아지는 벌판’은 이 값진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드는 인간의 탐욕과 암투를 그린 내용이다. 보물을 둘러싸고 선인과 악인, 심지어 북한군까지 개입하는 등 다양한 인간군상이 표현된다. 이렇게 개성 강한 인간 군상에는 김지미, 조미령, 김석훈, 윤복희등이 열연했다. 이 영화로 데뷔한 일곱 살짜리 주인공 윤복희는 후에 대가수로 성장했는데 이후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던, 깜찍하고 약아빠진 아역의 전형이었다고 할 만큼 아주 연기를 잘했다.
‘햇빛 쏟아지는 벌판’를 개봉하였을 때 일이다. 가슴이 조마조마한 채로 새로운 시도가 어떻게 관객들에게 다가가서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엔딩 크레딧이 나올 즈음이 되자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아, 역시 내가 액션영화를 하길 잘했구나’하며 용기를 얻고 그 방향으로 내 영화의 이정표를 세웠는데, 평단에서는 내 이정표와 관객의 기립박수가 무색하리만큼 굉장히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근래 들어 평단은 한국영화 발전에 대한 긴 전망을 가지고 질타와 격려를 안배하기 때문에 당시 나 같은 상황이라면 용기를 주고 ‘잘했다’ 또는 ‘어느 부분은 잘했고 어느 부분은 이랬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분석적이고 신중한 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편파적이고 무조건적이라 할 만큼 예술적인 문예영화 아니면 영화 취급을 하지 않았다. 평단과의 불길한 평행선은 이후로도 거의 좁혀지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평단과는 그 이후로도 계속 갈등을 이어갔다.
‘노다지’(1961)역시 탄탄한 내러티브와 스피디한 전개로 지금 봐도 신선하다고 평가 받는 작품이지만 당시 영화평론가들은 새삼스럽다 할 것도 없이 여전히 냉담했다. ‘노다지’ 역시 인간 욕망의 초상을 그렸다. 일이 없어 항상 다방에 앉아서 허망한 꿈만 그리고 있던 ‘우리들의 초상’인 주인공 두 명이 결국은 가족까지 버려둔 채 꿈을 좇아서 금광을 찾아 다니다가 종국에는 금맥을 찾긴 하지만 물욕 때문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죽이는 과정을 묘사했다. 금을 둘러싼 인간 군상들의 탐욕을 또 그린 것이다.
인간의 욕망에 대한 탐색을 여러모로 시도하고 영화화하여 흥행 면에서는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둔 뒤 다시 새로움을 찾아 무대를 만주로 옮겼다. 만주를 배경으로 한 독립군의 이야기 ‘지평선’(1961)은 이후 만주 대륙물의 유행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라고 평가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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