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논란에서 가장 놀라운 건 정부가 여전히 대기업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인식과, 정책 목적에 따라 정부의 영향력이 기업에 행사되는 건 나쁘다는 생각들을 꽤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인식과 생각은 옳지 않다.
정부는 현재 재계나 대기업 위에 군림하고 있지 못하다. 군림은커녕, 경제정책 과정에서 정부가 오히려 재계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됐다. 1995년 초가 관계 역전의 분수령이었다.
당시 유례없는 호황에 중국 등 신시장의 부상을 예견한 기업들이 앞다퉈 설비투자에 나서며 경기가 걷잡을 수 없는 과열로 치달았다. 30대 그룹의 설비투자 계획은 이미 과열 우려가 나왔던 전년에 비해서도 60%나 폭증한 30조원에 육박했다.
뒤바뀐 정부와 대기업의 위상
무던하다는 홍재형 초대 재경원 장관도 다급해졌다. 기업의 설비투자가 과도하면 재앙이 되어 닥칠 가능성이 컸다. 그 해 2월 9일 경영자총협회 연찬회에서 그는 "경기과열을 방지하기 위해 총수요 관리에 경제운영의 역점을 두겠다"며 긴축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꼭 닷새 후. 고 최종현 당시 전경련 회장이 홍 부총리를 정조준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무슨 총수요 관리라고 하는데, 그런 건 옛날 케인즈 경제학 시절에나 썼던 정책"이라며 용어까지 그대로 써서 긴축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정부는 지시하고, 재계는 읍소하는 관계를 뒤집은 쿠데타였다. 이어 재계는 금융시장에서 '행동'을 개시했다. 지방선거를 앞둔 마당에 시장금리가 25%까지 치솟고,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결국 정부가 항복하고 긴축정책을 사실상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정부와 재계의 위상은 반전됐고, IMF 체제를 거치며 정부는 이제 조세, 고용, 투자 등 주요 경제정책의 시행에 있어서 재계에 협조를 읍소하는 처지가 됐다. 따라서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의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를 통한 대기업 견제론은 거인이 된 재계에 미약하나마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난쟁이 정부의 안타까운 시도로 봐야 옳다.
정책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부가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나쁘다는 생각도 재고해볼 여지가 많다. 많은 이들이 기업의 목적은 수익과 주주가치의 극대화라는 주장을 편다. 따라서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행사하더라도 정부나 정치권의 입김에서 벗어나 오직 기업의 수익성을 높여 지분가치를 극대화하는 운용과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독립성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이런 주장에는 잘못된 관치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도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활동의 목적이 아무리 수익 극대화라고 해도 그것이 사회적 이해와 심각하게 충돌할 경우 어떤 식으로든 공공의 의지는 작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대기업은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나라에 있던 거대한 생산공장을 인건비와 세금이 싼 다른 나라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국내의 고용사정은 악화할 게 뻔하다. 그런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일국의 정부가 법규를 통해 직접적으로 기업의 생산공장 이전을 제어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그같은 극단적 경우를 감안해 어느 정도 기업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는 비(非)법규적 수단을 강구해 두는 것이 옳다.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공익맞게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통해 정부가 기업에 대한 견제력을 행사해야겠다는 발상을 옳지 않다고 볼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 견제력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당하게 행사되지 못하고 정상 모리배나 관료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적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최근 저축은행 비리에서 금융감독원 측의 직무유기와 협잡이 광범위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정부는 그 동안 공권력을 오용함으로써 불신을 자초해왔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제대로 되려면 정부가 먼저 신뢰 확보 방안을 찾거나, 공적인 감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이 전제돼야 할 것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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