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조두순 사건 피해 아동의 설레는 어린이날 상처 봉합수술만 6번… 악몽 딛고 일상으로"이젠 혼자 다녀도 돼, 엄마" 의젓해진 모습도
소녀가 웃었다. 처음 보는 기자가 낯설 법도 한데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낯빛은 곱고 어두운 그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녀린 소녀를 짓눌렀던 끔직한 악몽의 기억은 훌훌 털어버린 듯 했다. 지난해 6월 학교 운동장에서 초등학생을 납치, 성폭행한 '제2 조두순 사건'의 피해자 A(9)양(본보 2010년 6월9일 16면 참조)이 새로 이사한 서울의 한 아파트를 3일 오후 찾았다. A양은 사건 이후 처음 어린이날을 맞는다.
양말만 신은 채 문밖까지 뛰어나온 A양은 작지만 들뜬 목소리로 반갑게 인사부터 건넸다. 인터뷰 도중에도 스스럼없이 옆으로 다가와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한창 예쁘게 꾸밀 나이, 기자가 선물한 분홍리본 머리띠가 맘에 들었는지 냉큼 써보기도 했다. 와 키티를 좋아하는 소녀는 예의 바르고 밝은,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
A양은 이제 새 삶을 시작하고 있다. 사건 이후 상처 봉합수술만 6번, 마지막으로 배변주머니까지 떼는 수술을 받고 지난해 말 퇴원한 A양에게 올해는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고 학교도 새로 옮겨 다니게 됐다. A양의 어머니(39)는 "주변 사람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왔다. 우리 가족 누구도 그때 얘기를 단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아이가 기억을 진짜 못하는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안도했다.
퇴원 이후 A양은 몸도 마음도 한결 건강해졌다.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으니 몸무게도 늘고 키도 컸다. 무엇보다 배변기능이 많이 회복돼 화장실을 가는 횟수가 줄었다는 게 가장 큰 기쁨이다.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으로 줄넘기를 택할 정도로 운동도 즐긴다.
학교생활은 순조롭다. 며칠 전 수업시간엔 반 친구들이 선정한 모범어린이에도 뽑혔다. 친구들이 나눠 준 상장에는 "눈빛이 반짝반짝하고 초롱초롱하다. 자세가 바르다. 고운 말을 쓴다" 등등 다양한 칭찬이 쏟아졌다.
성적도 상위권이다. A양은 제일 좋아하는 국어 과목에서 맞춤법 하나를 틀려 96점을 맞았다며 아쉬워했다. A양의 어머니는 "영어 수학 학원도 보내달라고 보챈다. 사건 이후 6개월간 학교를 다니지 못한 공백을 메우려는지 스스로 열심이다"라고 뿌듯해 했다.
A양은 평소 말수는 적지만 수업시간에는 발표도 잘 하고 공부 욕심도 많다. A양은 1학기에는 기회가 없었지만 2학기 땐 꼭 반장선거에 나가보겠다고 벌써부터 노래를 부른다.
요즘 들어 A양은 독립선언도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등하굣길은 물론 모든 행선지에 동행하는 엄마에게 "혼자 가도 괜찮다"는 말을 부쩍 하는 것. "새로 사귄 친구들과도 놀러 다니고 싶은 눈치지만 아직은 불안해서 절대 혼자 밖에 내보내지 못하죠." 엄마는 대신 친구들을 불러 집에서 놀게 한다.
지난해 가을 서울시교육청에서 꾸며준 A양의 '공주 방'은 특히 친구들에게 인기가 높다. 원색의 화사한 벽지와 레이스 침대, 아기자기한 소품도 한 가득 놓여있다. A양은 처음 생긴 자기 방에서 혼자 잠이 든다고 했다. 스탠드를 꼭 켜두지만 그래도 병원에 있을 때처럼 무섭다고 중간에 깨서 우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사건 발생 당일 엄마와 함께 A양을 찾으러 다니고 6개월 병원생활동안 누나의 유일한 말동무였던 남동생(8)도 놀이치료를 받으며 아픈 기억을 지워나가고 있다. 이날 처음 태권도장을 다녀왔다며 자랑스레 흰띠를 두르고 등장한 동생은 인터뷰 내내 누나 옆을 든든히 지켰다.
A양 가족은 이번 어린이날 근처 대형마트에 있는 장난감가게에 가기로 했다. 점 찍어둔 인형을 틈틈이 모은 용돈으로 사겠노라고 귀띔했다. 놀이기구 바이킹 타는 걸 좋아한다는 A양은 이번 어린이날엔 롤러코스터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키가 작아 탈 수 없다는 걸 알고 놀이공원을 포기하는 대신 키를 쑥쑥 키워 조만간 돌아오는 생일날 소원을 이루기로 부모님과 약속했다.
어린이날 얘기에 신이 났는지 A양은 어느새 피아노 건반 앞에 가 앉았다. 3월부터 다시 피아노학원을 다니는데, 새로 배운 캐논변주곡을 뽐내느라 집에서도 연습삼매경이다. 덕분에 아빠는 예전처럼 아침마다 딸 아이가 연주하는 바흐의 미뉴에트 선율을 흥얼거리며 출근할 수 있게 됐다. A양과 가족은 사건 이전 누렸던 소소한 일상의 기쁨을 하나하나 되찾아가고 있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