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카드·CCTV 늘며 '슬쩍' 줄었지만…
"시대에 역행하는 범죄이지만 결코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소매치기 수사 13년 경력의 서울 강동경찰서 최영준 경사)
28년간 소매치기로 살아온 이희영(가명)씨의 사연(본보 3일자 14면)이 알려지면서 소매치기 세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경찰은 "여러 범죄 중에서도 소매치기는 '사양산업'이라 불릴 만큼 발생건수가 크게 줄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 지하철 등지에서는 여전히 소매치기가 기승을 부린다. 소매치기 범죄의 변천사와 실태를 짚어봤다.
뛰는 아날로그 범죄 위에 나는 디지털
경찰에 따르면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리던 1990년대만 해도 서울 시내에서 활동하는 소매치기범은 200~300명에 달했다. 전직 소매치기 이희영(45)씨도 "현재 여자 소매치기는 수십 명이라 하기 뭣할 정도로 적은 수만 남았다. 나보다 어린 애들은 2, 3명뿐일 것"이라고 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09년 소매치기 발생 건수는 2,573건, 경찰은 현역으로 활동중인 소매치기범을 대략 40~5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날로그 범죄로 불리는 소매치기 발생을 위축시킨 건 디지털 산업의 발달이었다. 첫 번째 주자는 신용카드. 2000년대 들어 신용카드 사용이 늘면서 현금을 훔치는 소득이 없자 자연히 범행도 줄었다. 지하철경찰대 제1수사대 5팀 박현수 팀장은 "90년대만해도 하루 1,000만원씩 버는 소매치기가 많았지만 요즘에는 하루 고작 10만원 정도 버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빈집털이나 부축빼기(취객 상대 절도) 등 범죄종류를 바꾼 소매치기범들도 속속 생겨났다. 실제 지난해 서울 강동구에서 아파트 빈집털이범으로 붙잡힌 피의자 윤모씨는 소매치기 세계에서는 손꼽히는 '기계'(기술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2008년 전후 수도권을 중심으로 폐쇄회로(CC)TV가 활발히 보급된 것도 소매치기를 줄이는 데 한 몫 했다. 특히 이들의 주요활동 영역인 지하철역과 버스 내부에 CCTV가 설치되면서 설 땅은 더욱 좁아졌다. 소매치기 수사 20년 경력의 서울 남대문경찰서 강력3팀 오연수 팀장은 "CCTV가 없을 때는 오로지 현장에서 붙잡아야 했지만 이제는 도처에 CCTV가 있어 검거비율이 높다"고 말했다.
CCTV의 등장은 범행 방식도 바꿔놓았다. 과거에는 지갑을 빼는 기술자와 바람잡이, 망보는 이가 3, 4인조 팀을 짜 활동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기술자 혼자 다닌다. 여럿이 다니는 것보다 CCTV에 적발될 위험성이 적고, 가뜩이나 적은 수입을 다른 일당과 나누지 않아도 되기 때문. 이희영씨도 "10년 전만해도 2, 3명이 함께 다녔는데, 지금은 해외원정 소매치기만 일당을 조직한다"고 증언했다.
5월 특히 조심 해야
전ㆍ현직 소매치기범들은 "소매치기는 병, 기술은 타고 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내가 죽어야 끊을 수 있다"고 진술한 피의자도 있을 정도다. 따라서 경찰은 "소매치기가 줄고 있지만 가장 손쉬운 범죄인데다 생계형이 많아 결코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소매치기의 표적은 여전히 지하철 환승역 등 사람이 많은 곳. 최근에는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축제장만 쫓아다니는 소매치기가 있을 정도로 각종 행사장이나 5일장 등 비교적 현금 소지자가 많은 곳에 몰리는 추세다.
특히 각종 기념일과 휴일이 많은 5월은 요주의 달이다. 반팔티셔츠를 입는 여름은 범행에 불리하기 때문에 5월은 막판 대목으로도 불리며 소매치기가 극성을 부린다. 지하철경찰대 박현수 팀장은 "팔짱을 끼고 걷는 연인이나 어린아이를 업고 있는 여성, 중년 여성 등 가방을 건드려도 둔감한 사람들이 주요 범행 대상"이라며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가방을 앞으로 메라"고 당부했다. 또 "신고만 하면 주변 CCTV 판독 등으로 소매치기를 쉽게 잡을 수 있으니 번거롭더라도 신고를 해달라"고 강조했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 '안테나'가 망 보면 '기계'가 범행… 소매치기조직 은어들
"너 회사 다닌 적 있지." "사장이 누구야."
평범하지만 소매치기가 이런 대화를 했다면 십중팔구 범행과 관련이 있다. 소매치기 세계에서 '회사'는 소매치기 조직을 가리킨다. 회사는 사장을 주축으로 기계와 바람, 안테나, 경리 등으로 꾸린다. 사장은 수입의 관리 및 배분, 범행장소 섭외 등을 맡는 두목이고, 기계는 직접 범행을 하는 기술자, 바람은 타인의 시선을 교란시켜 범행을 수월하게 돕는다. 안테나는 조직원과 떨어져 망을 보고, 경리는 훔친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보관한다.
이 중 가장 우대받는 것은 기계. 가령 100만원을 훔쳤을 때, 10%인 10만원은 공금으로 빼놓고 기계는 남은 돈의 10%인 9만원, 사장은 그 남은 돈의 10%인 8만원을 받은 뒤 나머지 73만원을 'N(사람수)분의 1'로 나눠 갖는 식이다. 대신 소매치기를 가장 끊기 힘든 것도 기계다.
소매치기 세계엔 '야당'도 있다. 이들은 소매치기 출신으로 직접 범행은 하지 않지만 현장에서 소매치기를 붙잡아 경찰에 넘기겠다고 협박, 돈을 뜯어낸다. 소매치기가 줄어들고 해외 원정이 잦아짐에 따라 점차 사라지고 있다.
소매치기의 수법으로 잘 알려진 안창따기(재킷 안주머니를 칼로 찢어 지갑 훔침), 굴레따기(피해자를 둘러싸고 동전 등을 떨어뜨려 숙이게 한 뒤 목걸이나 팔찌를 끊어 감) 등도 1990년대 초반 이후 자취를 감췄다. 이제는 빽따기(가방 옷의 지퍼 등을 열어 지갑 훔침)나 빽째기(가방 옷을 칼로 찢어 지갑 훔침) 정도만 남았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김혜경기자 thank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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