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술로 개발한 세계 최대 규모의 원자력발전소 증기폭발 실험장치 트로이(TROI)를 통해 진행된 국제공동 실험이 4월로 끝났다. 원전 증기폭발 사고를 재현한 국제공동 실험은 처음이다. 이 실험은 11개국이 참여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 원자력위원회(OECD/NEA) 세레나(SERENA) 프로젝트의 일환. 한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일본 등 세레나 회원국들은 이번 결과를 실제 원전에 적용해 증기폭발 같은 중대 사고에 대응하는 기술을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백원필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자력안전연구본부장은 "원전 사고에서 실제로 증기폭발이 일어날 가능성과 증기폭발이 발생할 수 있는 원자로 내 환경 조건을 처음 실험으로 확인한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트로이처럼 원전 안전을 지키는 최신 기술에 점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원전 내 증기폭발 처음 확인
트로이는 원전 사고 때 일어날 수 있는 증기폭발을 원전보다 훨씬 작은 규모에서 실제로 일으켜보는 대형 실험장치다. 어떤 환경에서 증기폭발이 일어나는지를 실험으로 확인하면 원전에서 실제 사고가 나도 증기폭발만은 막는 대비책을 세울 수 있다.
증기폭발은 금속 등 여러 물질이 녹은 고온의 용융물이 물과 반응해 순간적으로 엄청난 열에너지가 발생하는 현상이다. 뭉쳐 있던 용융물이 물을 만나면 작은 입자로 부서지면서 열 전달 면적이 수천~수만 배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핵연료가 증기폭발을 일으킬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원자력연 연구팀은 트로이로 2002년 증기폭발을 처음 확인했고, 2007년 착수한 이번 국제공동 실험에서도 핵연료 용융물 20kg을 물과 반응시켜 증기폭발이 일어남을 확인했다.
증기폭발은 용융물 양에 따라 원자로를 보호하는 격납건물을 파손시킬 정도로 위력적일 수 있다. 실제 원전 사고에서는 용융물이 수십 톤 발생하기도 한다. 홍성완 원자력연 중대사고ㆍ중수로안전연구부 책임연구원은 "트로이보다 작은 프랑스의 크로토스(KROTOS)도 증기폭발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데, 2012년 3월 완료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땐 증기폭발은 없었다. 수소폭발만 있었다. 핵연료 용융물이 물을 만나 발생하는 증기폭발과 달리 수소폭발은 핵연료가 녹으면서 생긴 수소기체가 원자로 내부에 가득 차 산소를 만나 순간적으로 타면서 일어난다.
보통 공기 중 수소가 10% 이상이면 폭발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원전에는 사고가 나도 수소 농도를 10% 아래로 낮추기 위해 수소를 제거하는 장치가 설치된다. 바로 수소재결합기(리컴바이너)다. 수소 발생 직후 재빨리 산소와 반응시켜 물로 만들어버리는 원리다. 그러나 리컴바이너는 수소 발생 속도를 따라잡기가 버겁다. 이후 개발된 장치는 수소점화기(이그나이터). 수소가 발생하는 족족 재빨리 연소시킨다. 수소가 한꺼번에 모여 큰 폭발을 일으키기 전에 작게 불을 내 없애버리는 것이다.
리컴바이너와 이그나이터는 전기로 작동한다. 후쿠시마 사고처럼 전력이 끊기면 소용 없다. 그래서 피동형 자동촉매 수소재결합기(PAR)가 나왔다. 수소가 PAR을 지나는 동안 촉매(화학물질)가 수소와 산소를 잘 달라붙도록 돕는다. 리컴바이너의 반응 속도를 높인 것이다. 현재 국내 원전은 대부분 리컴바이너와 이그나이터, PAR 중 2가지가 함께 설치돼 있다. 강현국 KAIST 원자핵 및 양자공학과 교수는 "수소폭발이 있었던 미국 스리마일 원전 사고 이후 국내외 원전들은 주로 PAR을 설치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열 식히는 방법
원전 사고에서 가장 문제되는 건 원자로가 정지된 뒤에도 남아 있는 붕괴열(잔열)이다. 핵연료물질이 잘게 쪼개지면서 생기는 핵분열생성물은 안정상태로 바뀌기 위해 많은 열을 내뿜는다. 이게 바로 붕괴열이다. 붕괴열을 그대로 두면 수천℃까지 뜨거워져 핵연료봉이 녹으면서 다량의 방사성물질이 나온다. 그래서 원전에는 붕괴열을 식히는 냉각장비가 필수다.
현재 우리 기술로 개발 중인 차세대 한국형 원전 모델인 'APR플러스'에는 전기 없이도 자연대류 현상을 이용한 새로운 냉각장치가 들어갈 예정이다. 이른바 피동냉각(패시브 쿨링)장치다. 피동냉각장치는 원자로를 둘러싼 격납건물 밖에 열교환기가 담긴 커다란 찬물탱크를 설치한 구조다. 단 물탱크 위치는 증기발생기보다 높아야 한다. 사고로 전기가 끊어졌을 때 증기발생기에서 붕괴열 때문에 뜨거워진 증기가 자연스럽게 위쪽 열교환기로 올라가 찬물에 의해 냉각된다. 증기가 식어 물로 변하면 다시 아래로 떨어져 증기발생기로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증기발생기와 연결된 원자로도 간접적으로 냉각되는 것이다.
현재 가동 중인 국내 원전에도 비슷한 피동냉각 기능이 있다. 안전주입탱크(축압기)라고 불리는 커다란 물탱크다. 원자로의 냉각수가 부족해지면 밸브가 열려 탱크에 있던 대량의 물이 쏟아져 들어가게 설정돼 있다. 밸브는 전기로 작동된다. 문제는 효율. 한꺼번에 많은 물을 퍼부을 순 있지만 냉각 효과를 오래 지속할 수 없다. 백 본부장은 "안전주입탱크 내부에 적절한 기구를 들여놓고 전기 없이도 원자로로 들어가는 물의 양을 조절해 좀더 오랫동안 냉각시킬 수 있는 기술을 개발 중"이라고 말했다.
피동? 능동? 뭐가 더 안전한가
최신 안전기술의 공통점은 전기 없이도 작동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쓰나미(지진해일)로 비상전력조차 모두 끊어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이 같은 피동형 안전장치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원전 안전장치는 대부분 전기로 작동하는 능동형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피동형이 능동형보다 반드시 더 안전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강 교수는 "작동하는 속도나 세기 면에서 피동형 안전장치가 능동형보다 충분치 못할 수 있다"며 "여러 사고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피동형과 능동형 안전장치가 각각 얼마나 유용하고 얼마나 필요할지를 면밀히 따져봐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