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카이스트의 혹독한 석사학위 과정을 마치고 대한전선 중앙연구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은사님이신 박송배 교수님께서는 석사 졸업 후 바로 박사과정에 진학하는 것보다 현장 경험을 쌓는 것을 권유하셨다. 더구나 카이스트 출신 석사는 대리 발령을 내고 월급도 많이 준다고 하지 않는가.
그 산업 현장이 대한전선이었다. 당시에는 삼성 LG와 더불어 가전산업의 3대 기업이 대한전선이었다. 매출 규모로 삼성전자와 비슷했다. (대한전선은 대우에 인수돼 대우전자로 변신하게 됐다) 70년대 말, 대한전선을 포함해 한국의 전자산업은 일본에서 설계 도면을 도입해 조립생산만 하던 단계에서 자체 연구개발을 막 시작한 때였다.
대한전선도 야심 차게 연구개발을 전담하는 중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통 큰 투자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중앙연구소의 실상은 무엇을 개발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수준이었다. 필자가 속한 부서는 정보처리연구실로서 당시로서는 첨단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활용한 정보기기 개발을 담당했다.
카이스트에서 익힌 마이크로 프로세서 기술로 본인이 개발을 주도하게 된 것이 당시의 한국의 현실이었다. 중앙연구소 정보처리 연구부 근무를 우리는 줄여서 중앙정보부에 근무한다고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었다. 밤 늦게 대취했는데, 경찰이 어디 근무하냐고 물어 중앙정보부에 근무한다는 대답을 하고는 극진한 안내를 받았다는 실화도 있었다.
필자는 한국 최초의 한글단말기를 만든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신혼인 아내 얼굴은 가끔 보면서 '월화수목금금금'으로 불철주야 연구에 몰입했다. 한국의 정보산업이 발전하기 위해 한글을 입력하고 출력하는 단말기와 프린터는 필수가 아니겠는가.
78년 어느 날 드디어 최초의 한글 프린터가 우리 한글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경쟁사를 압도한 이 개발 결과는 하느님 같은 설원량 대한전선 회장을 모시고 브리핑을 올리는 등 중앙연구소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됐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유엔 포럼에서 함마슐드 당시 유엔 사무총장 앞에서 자랑스런 한글의 원리와 개발 결과를 어떻게 영어로 설명했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다. 여기까지는 성공담이다.
한글 프린터 등에 이어 모두들 불가능하다는 대형 컴퓨터용 스마트 단말기 연구에 착수했다. 팀원들을 독려해 드디어 연구 완료 후 개발부에 이관하고, 언제 나를 칭찬하는 문서가 오는가를 기다렸다. 그러나 얼마 후 도착한 것은 도저히 생산으로 이관이 불가능해 개발을 포기한다는 장문의 비판 문서였다.
대안은 오직 하나, 직접 양산 개발까지 완료하는 것이었다. 다시 '월화수목금금금' 작전으로 생산부서로 이관까지는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생산부의 회신은 도저히 양산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생산부로 자원 이동해 함께 근무하면서 살펴본 즉 생산부의 의견은 정확했다. 양산의 개념이 없는 개발 제품이었던 것이다.
이제 중앙연구소의 자랑이 아니라 문제아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래도 몸으로 때워 생산을 완료하고 미국 수출영업의 계약을 기다리는 단계까지 진도가 나갔다. 그러나 미국에서 온 회신은 도저히 제값에 팔 수 없는 제품이라는 절망적인 것이었다.
결국 미국으로 직접 건너가 현장 영업에 돌입했다. 결과는 놀랍게도 제 값을 받고 팔았다. 이익률 10%미만인 가전제품에 비해 세배 이상인 30%의 고수익을 올리는 한국 최고가의 수출용 전자제품이 됐다. 자기 제품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이룩한 결과, 영업 현장의 고객의 니즈(Needs)와 연구 개발 역량을 결합하는 경험의 소산이었다.
이러한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보처리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실질적인 책임을 지게 됐다. 개인용 컴퓨터, 미니 컴퓨터, 네트워크 장비, 각종 단말기 등 PC 시대의 거의 모든 사업을 수행할 기회를 가지게 됐던 것이다. 다양한 사업 분야마다 유능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신속히 이관한 후 다른 사업을 벌어 나가는 멘토의 리더십을 배우게 되었다.
다시 박사과정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벌여 놓은 사업을 맡아 줄 인재들이 필요했다. 카이스트에서 직접 스카우트 해온 4명의 후배들을 포함, 대한전선에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분야마다 양성했다고 자부한다. 그 경험은 이후 많은 사업을 하면서 기업가 정신을 불어넣는데 크나큰 경험이었다. 사람은 자기의 비전과 기회가 주어지면 힘들다고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인간 정신도 배우게 되었다.
그간 필자와 더불어 '생고생'한 팀원들은 다른 팀 사람들은 편하게 사는데 왜 우리만 고생하느냐는 심각한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통금을 간신히 맞춰 퇴근하는 열성분자들에게 아침에 몇 분 늦었다고 시말서를 받는 관리 제도, 인간관계만 있을 뿐 아무 성과도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보다 먼저 승진하는 인사제도, 열 가지에 도전해 한 가지 실패를 했다고 매도하는 조직 구조 등이 우리를 맥 빠지게 했다.
도전하는 사람은 실패할 수도 있는데, 실패를 지원하지 않는 구조에서 도전이 나올 수 있는가. 신뢰를 깨뜨리는 불공정 행위가 얼마나 조직에 손실을 가져오는가. 우리는 묻고 답을 했고 그리고 이 과정에서 메디슨 정신의 기초인 도전 철학이 탄생하게 됐다. 실패는 나쁜 것이 아니라 성공으로 가는 학습과정이다. 실패에 대한 지원이 혁신의 근간이다! 대한전선에서의 경험은 공유된 문화가 핵심역량이라는 인식하에 메디슨 문화를 만드는 기초가 됐다.
참으로 가혹한 고생을 했지만, 그 기회를 준 대한전선에 감사 드린다. 이 기회를 빌어 밤늦게 일하다 통금으로 귀가를 못해 우리 집 신세를 진 팀원들을 뒷바라지해준 아내, 이사랑께도 감사 드리자. 당시 실패를 감싸준 설원량 회장, 정선호 소장(전 국회의원), 권철 전무, 팀원이었던 윤충섭 이명근(전 인터링크 사장) 정원호(이하 현 교수) 선우종성 김윤수 등 대한전선 시절의 수많은 인연이 주마등같이 스쳐간다. (지면관계상 모두 거론하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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