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명은 짧은데 대학가랴 군대가랴… 지원하는 학생이 없다
포스트 강수진을 노리는 대한민국 발레리나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강수진씨와 같은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군무를 추는 코르드발레 7년, 솔리스트 1년을 거친 강효정씨는 이 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로미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으로 데뷔한 데 이어 수석무용수로 승급했다. 강씨의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인 서희씨는 지난해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솔리스트로 승급했고 6월 열리는 ‘지젤’ 공연에서 주인공 지젤 역에 발탁됐다. 182㎝ 장신으로 국내 무대에서 마땅한 파트너를 찾기 힘들어 애를 먹었던 이상은씨도 독일 드레스덴젬퍼오페라발레단에서 주요 배역을 맡았다.
반면 국내 발레리노는 빙하기다. 다른 사람보다 늦은 고교 때 발레를 시작해 입단하자마자 주역을 맡아 온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가 술자리에서 역시 고교 때 발레에 입문한 비보이 출신의 주연급 단원을 폭행한 사건 때문이다. 사건 발생(지난달 25일밤) 후 한 달여 동안 우왕좌왕하던 국립발레단은 결국 여론에 떠밀려 폭력을 휘두른 수석무용수의 사표를 수리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드러난 더 큰 문제는 주역 발레리노가 성장할 수 있는 저변의 부박함이다.
2명의 주역 발레리노가 차기 공연인 ‘왕자호동’에 출연할 수 없게 되자 국립발레단은 러시아 볼쇼이발레단원 카림 압둘린으로 급하게 캐스팅을 변경했다가 볼쇼이의 불허로 취소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22~2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은 국립발레단을 떠난 3년여 동안 전막 발레를 한 경험이 없는 김용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코르드발레 한 단계 위인 코리페급으로 역시 주역 경험이 거의 없는 송정빈씨로 대체됐다.
주역 발레리노 자원 부족은 남성 무용수의 공급 부족과 관련이 있다. 하려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민간 발레단인 유니버설발레단에 따르면 지난해 신입단원 오디션에서 발레리노 지망생은 겨우 5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이 된 경우가 거의 없어 한 명도 채용하지 못했다. 반면 발레리나 지망생은 25명에 이르러 이 가운데 5명을 연수단원으로 채용했다. 실제로 이 발레단은 ‘호두까기 인형’ ‘심청’ 등 주요 레퍼토리의 남성 주인공을 대부분 엄재용씨가 도맡아 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별로 개선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서울 선화예중의 발레 전공자 65명 가운데 남학생은 겨우 8명으로 한 학년에 2, 3명 꼴(12%)이다. 선화예고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발레 전공자 62명 가운데 남학생은 10명(16%)에 불과하다. 예원학교 역시 발레 전공 60명 가운데 남학생은 6명에 그치고 있다.
군대 문제도 주역 발레리노 양성의 걸림돌이다. 남성 무용수가 군대에 갔다 오면 몸이 굳어 다시 발레를 할 수 있는 몸을 만들기까지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는 이 때문에 군이 발레단을 운영하고 있다.
대학을 필수 관문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주역 발레리노층을 얇게 하는 원인이다. 대학 4년을 거치면서 프로로 훈련하고 활약할 시간을 허비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발레리나도 마찬가지다. 최단 기간에 국내 최고가 된다고 해도 국제 무대에서는 이미 고령에 속하고 40세 전후의 은퇴 시기는 바싹 다가와 있게 된다. 외국의 경우 고교나 발레학교 졸업 후 대학을 가지 않고 18, 19세에 발레단에 입단해 적응ㆍ훈련 과정을 거쳐 주역으로 자리잡기 때문에 주역 데뷔 기간이 짧아진다.
한 발레 전문가는 “발레리노를 키우려면 공급 시스템을 안정화해야 하는 동시에 병역 대학 직업발레단 확충 등의 문제도 해결돼 남성 무용수가 예술가로서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기반이 뒷받침 돼야 한다”며 “어느 한 분야를 고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여건, 문화복지가 골고루 성숙해야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김청환기자chk@hk.co.kr
■ 되레 줄어든 혜택…발레 병역특례 인정 대회 변경에 '보이지 않는 손' 있었나
주역급 발레리노를 키우기 힘든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병역 문제다.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가 2008년 병역특례 대상 대회를 갑자기 바꾸면서 병역특례 혜택을 받는 발레리노 숫자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문화부는 동아무용콩쿠르 서울무용제 전국신인무용경연대회 발레부문 금상 이상 수상자에 주어지던 병역특례를 2008년 모두 폐지하고, 유네스코가 인증한 15개 국제대회로 대상 대회를 바꿨다. 문화부 관계자는 “음악 등 타 예술장르에 비해 발레 분야의 병역특례자가 많아 형평성 차원에서 취해진 조치”라며 “한국무용협회와의 협의에 의해 인정 대상 대회를 새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새로 특례 인정 대상이 된 국제콩쿠르 15개 가운데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는 2개(서울국제무용콩쿠르 코리아국제발레콩쿠르)에 불과하며, 나머지 13개는 모두 해외에서 열린다. 이들 외국 콩쿠르에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무용수가 참가하기는 어렵다. 국내에서 열리는 대회도 이전과 달리 모두 국제대회여서 국내 무용수가 수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문화부에 따르면 발레 분야 병역특례자는 인정 대상 대회가 바뀐 2008년 이전 매년 10명 내외에서 이후 5명 내외로 줄어들었다.
문화부가 유네스코 인증을 특례 인정 대회의 기준으로 삼은 것도 의혹투성이다. 문화부와 병역특례 인정 대상 대회를 협의한 무용협회 간부는 유네스코 산하의 국제극예술협의회(ITI) 한국 대표다. 유인촌 당시 문화부 장관은 TV 탤런트가 되기 전에 이 간부가 운영하는 무용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협회는 이 두 대회의 공식후원자다.
이에 대해 협회 간부는 “유 전 장관이 내 무용단 공연에 출연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당시 협의는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을 비롯한 다른 무용계 인사들과 문화부에 모여 함께 한 것이지 개인의 독단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김청환 기자chk@hk.co.kr
■ 발레 아카데미 설립이 폭력사태 해법이라고?
발레 인재 육성을 위해 국립발레아카데미 설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국립발레단이 이를 최근 수석무용수의 주연급 단원 폭행 사건 이후 대안으로 제시하자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립발레아카데미가 있으면 무용수 양성에 도움이 되겠지만 이것이 폭력 사건을 없앨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최태지 단장은 20일 “국립발레아카데미를 하루 빨리 세워 재능과 인성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는 게 이 같은 문제를 되풀이하지 않는 해법”이라고 말했다. 국립발레단은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에 국립발레아카데미 설립을 요청해 왔고, 문화부도 이에 대한 연구용역을 발주한 상태다.
그러나 한 공연전문가는 “국립발레아카데미가 있으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사건이 없어지는 것은 아닌데다 남성 지원자가 더 많아진다는 보장도 없어 양질의 발레리노 공급 확대와는 별 관련도 없다”며 “오히려 어렸을 때부터 지나친 식사조절과 규율로 트라우마를 입히는 등 부작용만 키울 수 있어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고 지적했다.
다른 공연 전문가는 “국립무용단 현대무용단을 비롯한 수많은 국립 예술기관에 아카데미가 없지만 이 같은 폭력 사건은 전무하다”며 “국립발레단이 2005년께 단원 간 폭력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함구령을 내린 뒤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가해자를 계속 주역으로 캐스팅했는데 이런 미흡한 대응이 폭력 사건을 부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1996~2001년 국립발레단장을 3회 연임하고 물러났던 최 단장은 2008년 다시 단장으로 취임해 현재까지 2회 연임 중이다.
김청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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