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청년들 운영… 넉달만에 한글 깨치고 중학 진학 도전
"선생님! 모두 출석했습니다. 오늘 수업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외기 입니다."
25일 저녁 8시30분 상주시 사벌면 용담1리 마을회관. 교실로 둔갑한 이곳 할머니방에서 70대 할머니들이 '할매학당' 수업을 막 시작했다. 반장 할머니가 나사웅(38) 선생님에게 다소곳이 수업전 인사를 올렸다. "누가 먼저 해보실까요"라는 소리에 막내 격인 김숙귀(70)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로 시작,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로 깔끔하게 암송을 마치자 20㎡ 남짓한 교실은 흥분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김 할머니 스스로도 나날이 쌓여가는 실력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올초 농촌마을 70대 할머니 15명으로 구성된 야학 한글교실 할매학당이 농촌에 활력을불어넣고 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할머니들이 개강 4개월 만에 우리 글을 완벽하게 읽고 쓰는데다 대입 수험생 못지않은 향학열로 주변 젊은이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이다.'할매학당'이란 이름도 이 마을 청년들이 붙였다.
이 수업에서 빠지지 않는 시험은 받아쓰기다. 나 교사가 이날 발가락 눈썹 배꼽 머리카락 등 신체 일부의 명칭 10문항을 천천히 부르자 할머니들은 자신의 답안지를 누가 볼새라 왼손으로 가린 채 하나씩 받아 적었다. 지우개로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할머니들은 초등학생과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잠시 후 옆 할머니와 바꿔 채점한 답안지 성적이 공개되자 시샘하는 목소리도 터져나왔다. "선생님 저는 옆집 배꽃을 솎아내느라 예습할 시간이 없었는데, 하루 종일 공부만 한 학생하고 같이 비교하면 불공평해요." 폭소가 터졌다.
음악 수업이 되자 할머니들은 학생에서 소녀로 되돌아갔다. '반달'과 '옹달샘'등 동요부터 '남행열차', '고장난 시계'등 트롯트까지 어깨동무를 한 채 목청을 높이는 동안 밤은 깊어갔다.
이 덕분에 까막눈이었던 할매학당 할머니들은 농협 등 금융기관에서 입출금 전표를 혼자 쓸 수 있고, 버스 노선을 묻지 않아도 혼자 귀가할 수 있게 됐다. 1월초 문을 연 할매학당이 4개월만에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이 할머니들이 짧은 기간에 한글을 독파하고 덧셈 뺄셈은 물론 간단한 곱하기 나누기를 할 수 있게 된 비결은 생활과 밀접한 교육 덕분이다. 예습에다 복습을 게을리하지 않는 할머니들의 노력도 한몫했다. 면사무소나 농협에서도 젊은이를 보면 평소의 궁금증을 물어야 직성이 풀렸다.
할매학당 김연년(76) 반장 할머니는 "젊은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까막눈 신세를 면하게 됐다"며 "모두 검정고시를 거쳐 단체로 중학교 진학하는 꿈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할매학당 소문이 퍼지면서 사벌면 전체가 향학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있다. 채영준 사벌면장은 "70대 할머니들이 젊은이보다 더 공부할 의지를 불태우면서 주민 모두 배우고 익히는 분위기에 휩싸이고 있다"며 "할매학당 할머니들이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개선과 교재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용태기자 kr88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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