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앞에서 휙휙 바뀌어지는 빠른 전개, 극의 진행에 맞춰 아귀가 척척 맞아 가는 조명. “최고의 앙상블”이라는 극단의 선전 문구가 공허하지 않다. 도시 뒷골목의 삶을 속도감 있게 그린 ‘바이올렛 시티’(원제 ‘이발사를 살해한 한 남자에 대한 재판’) 등 일련의 감각적 무대 레퍼토리를 확보하고 있는 극단답다.
극단 필통의 ‘이웃집 쌀통’은 몸을 사리지 않는 네 여배우들이 남기는 짙은 잔영으로 기억된다. 때로는 소극(笑劇ㆍfarce) 같기도, 때로는 호러물 같기도 한 무대이지만 배우들의 육체에서 비롯되는 진솔한 연기의 힘은 무대가 결국 인간의 것이라는 자명한 명제를 상기시키는 듯 하다. 예를 들어 싸움의 열기가 오르자 깡통에 담겨져 있던 물을 상대 배우의 얼굴에 그대로 쏟아 버리는 장면 같은 것은 쉽게 볼 수는 없잖은가. 강퍅한 삶의 단면이기에 개콘 보듯 웃을 수도 없다.
오순도순 이웃사촌이란 빛 바랜 사진첩 속의 추억일 뿐 현실은 그악스럽기만 하다. TV의 이른바 서민 드라마에서도 사라진, 적나라한 삶의 모습이다. 쓰레기 싸움 끝에 급기야는 쓰레기를 뒤집어 씌우는 장면은 이들의 판타지가 오로지 나날의 빵에만 국한돼 있음을 압도적으로 상징한다. 지난 시절 어법으로 하면 민중적 건강성이 사라진 시대를 바라보는 착잡함이 무대에는 숨어 있다.
코앞에서 펼쳐지는 변신은 3D 영상만이 아니다. 극의 전개에 따라 두세 명씩 쌍을 이뤄 무대 전체를 휘젓고 다니는 배우들은 연극 무대만이 갖는 힘을 웅변하고 남는다. 섬?한 금속성 굉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장면이 급반전하는 무대는 시선을 잠시라도 떼는 날에는 큰 손해를 볼 것이라고 객석에 경고하는 듯 하다. 쌀 속에서 신체의 일부인 듯한 물체를 발견하고는 극장이 떠나가라 호들갑 떠는 대목에서 객석은 무대로부터의 압력을 느끼고 만다. 그러나 바로 다음 “집값 떨어진다”며 왜장치는 대목에서 객석은 자신의 모습을 무대에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다소 뜬금없지만 1만원권 돈다발이 불쑥 나오는 상황은 마늘밭에서 거금이 나왔다는 최근 사건과 겹치며 객석을 무대로 잔뜩 흡인시킨다. 자, 이들은 경찰에 신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러나 푼돈도 아쉬웠던 이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공범이 된다. 4등분해 나눠 갖기로 한 것이다. 지문을 인멸하려 통을 싹싹 닦기까지 한다. 이런 세상이잖소 하며 천연덕스레 묻는 무대의 끝, 불길한 고양이 울음이 뒤통수를 간질인다. 5월 15일까지 이다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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