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병문안을 다녀왔다. 동네에서 제법 큰 편의점을 하는 친구다. 우연히 그 친구 집에 전화를 했던 다른 친구가 큰 병원에 입원한 지 보름가량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몇몇 친구에게 연락해서 병원으로 찾아간 것이었다. 몇 년 전부터 그 친구 건강이 좋지 않다는 말은 들었지만, 병원에 보름을 넘게 드러누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탈이 난 곳은 간이었다. 간이 딱딱하게 굳는 병이었다. 1년이면 거의 300일 이상을 술을 입에 달고 사는 친구니, 그게 화근이 되었던 것 같다.
'환자 아니다' 우기는 친구
병실에 우르르 들어가, 한편 당황스러워하고 한편 반가워하는 친구를 보고, 모두들 한 마디씩 건넸다. 아니 멀쩡한 인간이 무슨 병원이냐, 가게는 어떻게 하고 이렇게 누웠느냐, 친구들이 만나주지 않으니 이제 병원에 누워서 이렇게 불러대느냐, 빨리 일어나 등산이나 가자, 아무개도 너처럼 아팠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그러니 아무 일 없을 게다 등등 너스레를 떨면서 친구를 위로하고 한참 뒤에 병원을 나섰다.
만난 김에 한 잔 하자고 해서 소줏집에 앉았다. 술 때문에 입원한 친구를 두고 무슨 술이냐는 타박이 있었지만, 모두들 재수 없는 소리 말라고 면박을 주었다. 술기운이 오르자, 한 친구가 동네 병원을 하고 있는 의사 친구에게 물었다. "야, 아무개야, 걔 괜찮은 거니? 희망은 있는 거야?" 의사 친구의 답인즉 이랬다. "제법 심각해. 지금이라도 자신이 병자인 것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치료를 하면 그나마 얼굴 볼 날이 더 길어질 텐데, 문제는 자기는 간이 좀 나쁠 뿐 다른 곳은 아직도 멀쩡하다면서 병자가 아니라고 우기는 거야."
듣고 보니, 간이 좀 나쁘지만 다른 곳은 멀쩡하니 병자는 아니라는 말은 정말 우습고도 한심했다. 하기야 젊어서부터 운동으로 다져진 그 친구 근육은 아직 단단해 보였다. 몇 해 전까지 산악자전거를 탔고, 등산을 좋아하여 백두대간을 종주하기까지 한 친구가 아닌가. 누가 "걔 말도 그럴 듯하네." 하고 웃자, 의사 친구는 한심한 소리 말라며 핀잔을 주었다.
"야, 이 사람아. 사람이 모든 장기에 100% 병이 들어야만 병자가 되는 건 아니야. 수많은 장기 중 하나에 병이 들면 병자가 되는 게야. 위에 암 덩어리가 생기면 그 사람은 큰 병자인거지. 그런데 나머지 95% 장기가 멀쩡하니 아직은 괜찮다고 하면서 나를 병자로 보지 말라 우기고, 적극적으로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냐? 뇌에 종양이 생겼는데도 허파와 위장, 대장, 소장, 신장, 그리고 팔다리가 멀쩡하니 아직 병자가 아니고 건강하다고 우기면 그 사람 얼마나 더 살겠냐? 엉!" 의사 친구가 음성을 높이자, '걔 말도 그럴 듯하네'라고 말했던 친구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술에 취해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픈 친구와 보냈던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 친구와 나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같이 다녔다. 그 집에 무시로 드나들었고, 같이 밤을 새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친구는 없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아파 선뜻 지갑을 여는 고운 심성을 가졌지만, 한편으로는 영혼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역설하는가 하면, 우주인이 지구에 문명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라고 우기기도 하는 비합리적인 구석이 있기도 하였다. 그것이 아마도 자신이 병자가 아니라고 우기는 근거일지도 모를 일이다.
"온 세상이 다 그래"
문득 의사 친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떠올랐다. "병든 곳이 있는데도 건강한 곳이 더 많으니 아직 병자가 아니라고 우기는 건 온 세상이 다 그래. 그 친구만 그런 게 아니야." 그래, 그렇구나. 그 친구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의사 친구의 말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창 밖을 바라보니, 전철은 어느 사이 지하 터널을 빠져 나와 있었다. 어둠 속에 교회의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가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흡사 무덤 같았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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