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개봉하는 ‘마오의 라스트 댄서’의 한 장면. 1980년대 초반 미국 휴스턴에 짧은 발레 유학을 온 중국인 리춘신은 부상당한 무용수를 대신해 무대에 오를 기회를 잡는다. 하지만 곧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다. “중국인에게 돈키호테 역을 맡길 수 없다”는 것. 춘신을 미국에 데려온 벤은 “말론 브란도도 사무라이 역할을 했다”며 춘신을 옹호한다. 벤의 말은 물론 거짓이지만 섞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흥행을 위해서라면 할리우드는 외국인 배우와 외국인 감독의 수혈을 마다 않는다. 그런 할리우드에도 오래도록 순혈주의 전통이 이어져 온 영역이 있다. 미국적 가치를 대변하고 미국의 자존심을 나타내는 슈퍼 히어로물의 주인공은 미국인만이 접근 가능한 성역이었다.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다스베이더를 연기하며 ‘내가 네 아버지다 (I’m Your Father) ’라는 명대사를 남긴 데이비드 프로우즈는 1970년대 ‘슈퍼맨’이 되고 싶었지만 오디션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영국 출신이라는 단순하지만 바꿀 수 없는 냉혹한 현실 때문이었다.
오랜 전통도 시간의 무게를 견뎌낼 수 없는 것일까. 최근 ‘슈퍼맨’의 새 시리즈 ‘슈퍼맨: 리부트’의 새 주인공으로 낙점받은 배우는 헨리 케빌. 바로 영국인이다. 슈퍼맨이 미국을 상징하는 슈퍼히어로라는 점을 감안하면 참 획기적 캐스팅이다. “아주 역겨운 캐스팅이다. 영국인 슈퍼맨은 보지 않을 것”(에인트잇쿨뉴스)이라는 격한 반발도 있으나 대세는 어쩔 수 없다. 슈퍼 히어로가 더 이상 미국인만의 점유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배트맨’ 시리즈의 배트맨은 이미 영국인 크리스천 베일에게 넘어간 지 오래다. ‘토르: 천둥의 신’의 주인공 토르는 호주 출신 크리스 헴스워스가, ‘그린랜턴’의 그린랜턴은 캐나다인 라이언 레이놀즈가 각각 연기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요즘 기골 장대한 미국인 배우가 딱히 없기 때문이다(샤이아 라보프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톰 크루즈가 하늘을 나는 모습은 아무래도 상상이 안 된다).
섞음을 꺼리지 않는 할리우드의 과감성은 감독과 장르의 이종교배로도 나타난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감독은 멜로 ‘500일의 썸머’로 데뷔한 마크 웹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의 메가폰은 롭 마샬이 잡았다. ‘시카고’와 ‘나인’ 등을 연출한 뮤지컬영화 전문 감독이다. 홍상수 감독이 ‘해운대’나 ‘괴물’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표현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개방성은 오래도록 할리우드의 힘이었다.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방송계와 잘 섞이지 않고 독립영화와의 교류도 적은 충무로의 경쟁력은 과연 무엇일까. 영화계에도 퓨전이 필요한 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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