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50년만 (가계부를) 쓰고 그만 쓸라고 그랬는디, 미련이 남아 아직도 쓰고 있소."
24일 전남 진도군 의심면 침계리. 안방에서 누렇게 색이 바랜 가계부를 손수 펼쳐 보이던 조영춘(83)씨는 "가계부를 쓰다 봉게(보니까) 재미가 엔간한 게 아니더라"며 "55년째 하루도 안 빼먹고 가계부를 쓴 사람이 어디 또 있을랑가 모르겄다"고 웃었다.
조씨가 주부들만 쓰는 것으로 인식됐던 가계부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57년 2월부터. 3남 3녀 중 장남이었던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부모와 동생들, 어린 자식들까지 모두 열두 식구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가난한 농사꾼의 뻔한 수입에 그의 생활은 쪼들림의 연속이었다. "그때는 항상 돈이 궁했던 터라 도대체 그 놈의 돈이 어디로 새는지 궁금했제. 그래서 우선 우리 애기들부터 용돈과 학비는 얼마나 나가는 지 한번 뽑아보자며 일기 형식으로 끼적거리기 시작한 거시 지금까지 온 거시여."
그는 이듬해부턴 가계부 작성 형식을 바꿨다. 일기 형식으로 쓰다 보니 연말에 수입과 지출을 따로 빼서 정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항목별 작성 방식으로 변경했다. 가계부 낱장의 앞면에 가계 지출 현황을 세입과 세출로 구분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예를 들면 세입은 곡물과 특용작물, 가축 수입 등으로, 세출은 영농비, 가계용품비, 공납금, 차용금 등으로 나눠 적는 식이다. 뒷면에는 농사일지와 가정 안팎의 대소사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덕분에 조씨의 가계부에선 대한민국 농촌 가구의 물가 변천사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다. 그가 쓴 1957년도 가계부를 보면 쌀 1되 값은 300환으로 적혀 있다. 지금은 쌀 1되에 3,800원정도 하니, 47배가 오른 셈이다. 또 강아지 1마리는 720환에서 3만원으로 200배, 소주 1병(1.8리터)은 230환에서 3,550원으로 154배나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 뿐만 아니다. 그의 가계부에는 교통비와 서민들의 물가 변동은 물론 매일매일 발생하는 마을과 진도군의 소소한 역사, 민속놀이, 각종 증명서, 마을의 구전 설화, 농기구 제작법 등도 기록돼 있다.
1978년도 가계부를 뒤적이던 그는 "여기 봐보랑께. 진도에선 이때 가을이 돼가꼬 겨우 주민들이 쌀밥을 먹게 됐다고 적혀 있제? 그라고(그리고) 가계부 표지에 적힌 제목도 '잡기장'에서 '공책'으로, 다시 '노트북'으로 이렇게 변했어. 어때? 노트 한 권에서 보는 시대변천사, 재밌제?"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가계부를 언제까지 쓸거냐'는 질문에 조씨는 호탕하게 웃으며 한 마디 건넸다. "50년 넘게 썼는디, 글고 여태 가계부를 쓴 덕에 헛돈 안 쓰고, 절약해서 여섯 새끼(6남매)들 모두 시집, 장가보냈는디 이제 와서 중단할 수는 없제. 죽을 때까지 쓸 거시어."
진도=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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