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과서 어려워졌는데 수업시간 줄여라? 사교육 의존 불 보듯
"새로 바뀐 교과서에 따른 교습방법 개발도 버거운데, 교육과학기술부는 '집중이수제'니 '창의적 체험학습'같은 뜬구름 잡기식 교육목표를 자꾸 도입하라고 강요하니 갈피를 잡을 수 없어요."
이명박 정부가 의욕적으로 마련한 2009개정교육과정(이하 2009과정)이 처음 적용되는 올해 교육현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교사들의 목소리들이다. 현 정부는 출범 1년 만인 2009년 12월 학년ㆍ교과군(群)을 통합하는 집중이수제 등을 골자로 한 새로운 교육과정을 확정했다.
원래 교육과정은 법에 의해 고시하고 2년 뒤부터 연차 적용되는데, 2009과정은 확정 1년만인 올해 초등 1ㆍ2학년, 중ㆍ고 1학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학교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나머지 학년도 사실상 올해부터 2009과정의 주요 내용이 적용된다.
게다가 2007개정교육과정에 따라 전면 개편된 교과서가 올해에야 처음으로 전체 학년에 적용돼 새 교과서 파악도 벅찬 교사들에게 2개 학년을 하나로 묶어 교육과정을 통합하고, 초등학교의 경우 사회ㆍ도덕, 과학ㆍ실과, 음악ㆍ미술을 하나의 교과로 묶는 교과군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2007과정 교과서로 09교육과정을 가르치라'는 것이다. 여기에다 '학생들의 학습부담을 줄이라'며 과목별 수업시간도 감축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교과서를 충실하게 가르치기가 더 어려워졌다.
특히 2007과정 교과서는 이전 교과서보다 더 어려워졌다. 한국일보 설문조사 결과 초등교사의 54.7%가 '어려워졌다'고 답했고, '매우 어려워졌다'는 응답도 13.1%에 달했다. 교사 10명 중 7명 가까이가 새 교과서가 더 어려워졌다고 답한 것이다. 특히 사회ㆍ도덕(38.8%)과 수학(26.6%) 과목이 어려워졌다고 응답했다. 학급시간당 배워야 하는 내용은 늘어나고 교과서는 더 어려워진 상황에서 교과과정을 따라가기 힘든 초등생들은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학습부담을 경감하고 창의인성을 기른다'는 2009과정이 오히려 사교육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교과과정을 2년 단위로 묶는 것 역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교과부는 당장 올해 1, 2학년부터 학년ㆍ학기별로 나뉘어 있는 교과서는 무시한 채 2개 학년씩 묶고 수업시간을 20% 범위 내에서 학교 자율적으로 늘리거나 줄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대부분 교과목을 담임교사가 가르치는 초등학교의 현실을 감안하면 매년 바뀌는 담임교사가 2개 학년치 교과를 자율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학습 결손을 부를 수밖에 없다. 교과부는 학년군제에 맞춘 교과서를 이르면 내년까지 보급한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또 다른 졸속 교과서를 낳게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우리나라는 매년 초등학생 중 28만명 이상(2009학년 기준)이 학기 중 학교를 옮겨, 전국 초등학생 330만명 중 연간 8.5%의 높은 전학률을 보인다. 그런데 학교별 집중이수제가 도입되면 학교마다 학습 진도가 달라져 전학생은 교과과정에 심각한 누락과 중복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교과부는 2009과정을 도입하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교육청이나 복수 학교별로 '거점 학교'를 지정해 전학생을 교육한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대부분 도보로 통학하는 초등학생의 경우 '거점 학교' 통학이 불가능하다. 교과부는 결국 각 초등학교에 "전학생 교육은 학교 자율에 맡긴다"는 지침을 보내 사실상 초등 전학생을 위한 별도교육 포기를 공개 시인했다.
설문에 참여한 초등교사들은 "집중이수제가 실시되면서 전학생의 경우 학습 소외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1년 내내 미술 또는 음악 시간 없이 학교를 다녀야 하는 초등생은 얼마나 힘들까" 등의 걱정을 내놓으며 "2009과정은 교육현실을 무시한 탁상공론 행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영오 기자
■ 창의적 체험학습 시간은 한자·IT시간
2009 개정 교육과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창의적 체험활동의 강화다. 학생의 창의성을 기르는 데 초점을 맞춰 기존의 재량활동과 특별활동을 통합하고 시간도 늘렸다. 재량활동이 본래 취지와 달리 교과 보충학습으로 변질되는 등 형식적ㆍ획일적으로 운영됐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일선 교육현장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초등학교의 경우 '창의'는 말뿐이고, 오히려 어린 학생들의 학습부담만 키웠다는 지적이다.
창의적 체험활동은 학교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실시하도록 돼 있다. 환경, 에너지, 보건, 경제, 교통안전, 정보화, 다문화, 양성평등 교육 등 필요한 프로그램을 학교 실정에 맞게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과학기술부가 고시한 2009 개정 교육과정을 보면 '초등학교 교육과정 편성ㆍ운영의 중점' 항목에 '정보통신 활용 교육, 보건교육, 한자교육 등은 관련 교과(군)와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하여 체계적인 지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고 명시돼 있다.
서울 A초등학교의 박모 교사는 "이전까지는 과학의 날이 되면 관련 교육을 하고, 특별활동 시간에는 학생회 선거도 하는 등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워 재량활동을 해왔다. 그런데 창의적 체험활동으로 이름만 바뀌고 정보통신, 보건, 한자 교육을 하라고 하니 자율성이 사라지는 모순이 생겼다"고 말했다. 교과부에서는 강제사항이 아니라고 하지만 학교 평가 등에서 프로그램 내용들이 반영되기 때문에 학교에선 창의적 체험활동이란 명목으로 정보통신, 보건, 한자 교육을 중점적으로 실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교사는 "결국 한글도 못 익힌 초등학교 1학년이 어려운 한자 공부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학생들에겐 교과목 하나가 추가된 셈"이라고 말했다.
창의적 체험활동의 영역을 자율, 봉사, 진로, 동아리 활동 등 4개로 나눈 것도 초등학교 실정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진로, 동아리, 봉사 활동은 중고교생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활동 내용들은 입학사정관 전형에 반영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구분을 초등학생에게까지 적용하다 보니 학생들이 입시에 유리하다며 경쟁적으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활동 내용으로 올리거나 동아리 활동과 관련해 청소년 단체에 무더기로 가입하는 등의 부작용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좋은교사운동의 홍인기 정책위원장은 "정부가 창의적 체험활동과 관련해 이러저러한 것을 하라고 하면 학교에서는 별다른 교육철학적 고민없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의 역량 개발보다는 결과물 위주의 체험활동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한준규 기자 manbok@hk.co.kr
■ 국영수 편중현상 심화… 예체능은 축소
2009 개정 교육과정 도입 이후 국영수 편중은 더욱 심해졌다.
올해 새 학기 전국 초중고교에 적용된 2009 개정교육과정의 골자는 10~13개인 한 학기 이수 과목수를 8개 이하로 줄이고, 각 학교가 수업 시수(時數)를 교과군별 기준시수의 20% 범위에서 자율적으로 증감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 음악 미술 등을 예술 교과군으로 묶는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맞춤형 교육을 장려하기는커녕 입시위주 교육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 실제 올해부터 2009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된 초등학교 1,2학년에서 이미 국영수 편중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올해 1월15일~2월28일 전국 334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174개 학교(52.1%)가 1학년 국어 수업시수를 늘렸다고 답했다. 늘어난 시간은 평균 10.3시간에 달했다. 또 2학년 국어 수업을 늘린 학교도 153개교(45.8%)로, 평균 10.4시간을 늘렸다.
수학 역시 1학년 166개교(49.7%), 2학년 180개교(53.9%)가 수업 시간을 평균 8.7~8.9시간 늘었다. 반면, 바른생활은 111개 학교에서, 슬기로운생활은 120개 학교에서 수업시간이 평균 5.2~5.8시간 줄었다.
서혜정 교총 정책개발국 부장은 "2009 교육과정이 국영수 편중현상을 부를 것이란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며 "이 같은 현상이 심화하면 예체능 등 비인기 과목 수업을 유지할 수 없고 결국 전인교육은 불가능해진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교과부는 "영어 수학 수업의 증가는 기존 사교육 중심으로 운영되던 영수교육을 공교육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각 학교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황당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또 각 시도교육청이 국영수 수업 시수 증대 상한선 등을 설명하고 있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지난달 말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2009 개정 교육과정 실시로 인해 국영수에만 학교 교육이 편중되는 부작용이 있다"며 "적어도 체육시간은 줄이지 못하도록 새로운 개선안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뒤늦은 사태 수습에 나섰다.
김혜영 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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