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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위기 1년 유럽을 가다/ (상) 끝나지 않은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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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위기 1년 유럽을 가다/ (상) 끝나지 않은 위기

입력
2011.04.19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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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낮인데 문 닫은 아크로폴리스… 그리스 '희망의 門'조차 닫힌 듯

그리스 아테네의 중심부 언덕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 신과 역사와 철학이 넘치는 제1의 관광명소다. 매년 이맘때면 관광 시즌개막과 각국의 여행객들로 북적대지만, 작년부터 아크로폴리스는 폐장시간이 오후 7시에서 3시(마지막 입장시간은 2시30분)로 단축됐다.

재정긴축 때문이다. 유럽연합(EU)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그리스 정부는 재정건전화를 위해 공공지출축소를 약속했고, 관광지를 포함한 비정규직 공무원들을 대거 감원했다. 아크로폴리스 역시 입장권을 팔고 순찰을 돌 인력이 줄어, 결국 폐장시간을 앞당기게 됐다. 관광수입이 늘어야 구제금융도 갚을 수 있을 텐데, 구제금융 조건이행을 위해 관광지 문을 닫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가 재정난을 견디지 못해 EU에 구제금융을 신청(작년 4월23일)한 지 꼭 1년. 아일랜드 포르투갈을 차례로 집어 삼킨 남유럽 재정위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구제금융체제 1년을 보낸 그리스는 확실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한국이 IMF체제 하에서 10년 같은 1년을 보낸 것처럼, 이 낙천적인 희랍인들 역시 분노, 좌절, 피로감으로 찌들어 보였다.

그 동안 그리스가 겪은 가장 큰 변화는 공공부문의 축소. 재정위기를 촉발시킨 '비대'공공부문을 다이어트하기 위해 그리스 정부는 대대적인 감원의 메스를 댔다. 먼저 임시직 공무원들이 대거 해고됐고, 정규직 공무원 1명을 뽑으려면 5명이 퇴직해야 하는 새로운 룰까지 정했다.

하지만 공공부문 축소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청소인력을 감원한 탓에, 도심거리엔 쓰레기가 넘쳐난다. 도심치안을 책임지던 '디아스'(2인1조의 오토바이 기동경찰대)까지 줄이면서, 범죄율은 높아졌고 불법이민자들도 급증하는 추세다. 관광수입에 의존하는 나라로선 치명적인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의 경제성장률은 현재 10분기 연속 마이너스 행진상태. 유로존 17개국 가운데 최악이다. 아테네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신타그마 지역의 에르무 거리는 경기침체를 견디지 못해 폐업한 가게들이 즐비하다. 더구나 청소년들이 빈 가게 유리창마다 그려놓은 낙서(그라피티)가 을씨년스러움을 더하고 있지만, 이를 제지하거나 지울 인력조차 없다. 한 현지시민은 "빈 가게야 그렇다쳐도 이런 지저분함을 방치하는 건 경제가 망해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혹독했던 1년,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할지. 18일(현지시간)에도 채무재조정 가능성이 고조되면서 국채값이 폭락하는 등 그리스 재정위기, 나아가 유럽 재정위기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나랏빚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아테네 글·사진=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그리스 정부 "적자 감소" 발표에 "임금도 못주면서…" 불신 팽배

빚 많은 나라가 해야 할 일은 최대한 지출을 줄이면서 수입을 늘려 하루빨리 빚을 갚는 것. 하지만 지금 그리스에서 '절약'은 숱한 반발에 막혀 정체 중이고 '수입증대'에는 마땅한 방법조차 없는 상태다. 국제 금융시장은 이미 구제금융 다음 단계로 그리스의 채무재조정 신청을 기정사실화하며 자금조달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하고 있다.

끝없는 반발

구제금융이 현실로 자리잡은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도심에선 연일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지난 11일에도 아테네 시내 국립병원과 대학들이 밀집한 '바실리스 소피아' 거리에서는 긴축정책으로 문을 닫은 아테네대학 부속병원 직원들이 밀린 임금을 지급하라며 피켓을 들었다. 해고 직원 야니스 루도스씨는 "민간 기업은 물론, 정부조차 임시직 공무원을 해고한 뒤 임금지급을 미루고 있는 상황"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스 정부는 최대 아킬레스건이었던 재정적자가 2009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15.4%에서 작년에는 10% 아래로 줄어들었다고 사태 호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임금을 체불해 억지로 줄인 수치가 무슨 의미냐"는 게 현지 시민들의 냉소 가득한 반응이다.

기득권층 역시 반발 일색이다. 그리스 정부는 구제금융의 대가로 그 동안 엄격하게 제한해 왔던 자격증 시장을 외부에 개방할 예정. 특히 최고의 인기직업인 관광가이드는 그리스 내 대표적인 고학력ㆍ고소득층이었지만, 향후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질까 결사항전 태세를 보이고 있다.

"희망이 없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국민들이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 재정위기를 부른 뿌리깊은 '그리스 병'에 좀처럼 탈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정부에 대한 불신. "재정적자를 작년 140억유로나 줄였다" "성장률이 내년엔 플러스가 된다"는 정부의 발표를 시민들은 믿지 않는 분위기다. 이번 위기가 정부의 재정적자 규모 은폐에서 비롯된데다 요즘도 툭하면 정부 발표 수치가 얼마 안 가 더 나쁜 쪽으로 수정되고 있어서다.

오랜 '뷰로크라시'(관료주의) 문화도 넘기 힘든 장애물. 복잡한 서류절차와 공무원들의 만만디 행정으로 그리스에서는 행정절차가 몇 달씩 걸리기 일쑤. 지난해 대거 퇴직한 공무원들조차 아직 연금을 못 받고 있다. 지하철에서 만난 전직 공무원 테오 부주라스씨는 "신청서류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탓도 있지만 난마처럼 얽힌 처리절차를 꿰고 있던 고참 공무원들이 인수인계 없이 퇴직해버리면서 행정 공백이 생긴 게 진짜 이유"라고 귀띔했다.

구제금융 청산을 위해선 결국은 긴축과 세수증대에 기대야 할 처지. 그러나 최근과 같은 임금삭감과 긴축재정은 필연적으로 내수 위축을 가져와 되려 경기악화라는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어 희망은 점점 더 멀어지는 상황이다.

디폴트 가나

이 같은 구조적 한계는 최근 그리스를 더욱 깊은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급한대로 급전(구제금융)은 빌려 썼지만 앞으로는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는 게 관건. 하지만 지난 14일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의 "6월 예정된 채무지급 능력 감사 이후 그리스가 채무재조정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발언 이후 그리스 국채금리는 연일 사상최고치(18일 10년만기 금리 14.56%)를 경신하고 있다. 조만간 채무 일부를 탕감(워크아웃) 받자고 나서거나, 결국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할 것이란 전망 때문이다.

통상 7% 안팎이 10년 만기 국채 발행을 위한 한계선으로 여겨지는 점을 감안하면 그리스의 현재 자체 금리조달 능력은 '제로'나 다름 없는 셈. 게오르게 파파콘스탄티누 재무장관조차 최근 외신인터뷰에서 "계획대로 내년에 금융시장에 복귀하지는 못할 것 같다"고 고백할 정도다.

아테네 글ㆍ사진=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인터뷰/ 구셀라스 그리스 재무부 차관

디미트리스 구셀라스(사진) 그리스 재무부 차관은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시장의 우려와는 달리 "지난 1년간의 긴축정책이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해외투자 유치를 통한 경제회복도 조만간 가시화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시했다.

-전체 유럽의 눈총이 그리스를 비롯한 3개국에 쏠려있다. 불편하지 않나.

"1년 전엔 훨씬 심각하지 않았나. 하지만 외부지원에 따른 이행조건을 모두 지키고 있으며 3개월마다 점검도 받고 있다. 껄끄러운 시선은 점점 나아질 것이다."

-최근 언론보도를 보면 분위기 반전을 위한 문책성 개각얘기가 나오고 있다.

"근거 없는 예측이다. GDP 대비 재정적자가 재작년 15%대에서 작년 10% 아래로 줄었다. 그리스는 지금 정부조직이 비대했던 국가에서 컴팩트한 국가로 변모 중이다. 구청 같은 지방자치조직을 대폭 줄여 연간 10억유로를 절감할 계획이다. 예전엔 외국인 투자에 29개 절차가 필요했으나 앞으로는 원스톱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내년부터는 플러스 성장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구제금융 이후에도 국채발행 금리는 여전히 높다. 시장에선 디폴트 가능성도 나오는데.

"특히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아 시장을 자극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결과다. 그들에게 계속 항의하고 있다."

-최근 유럽중앙은행(ECB)의 금리인상으로 구제금융 국가들은 이자 부담이 늘어날 텐데.

"그리스가 받은 구제금융은 금리인상과 무관하다. 오히려 최근 지원금 800억유로에 대한 이자를 1%포인트 감면해 줘 60억유로를 아낄 수 있게 됐다. 이는 굉장히 좋은 신호다. 그리스 경제가 숨 쉴 여유가 생겼다."

-유럽은 단일통화여서 환율조정이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긴축 만으로 재정회복이 가능하겠나.

"외환위기 당시 한국처럼 탄력적인 환율 조정을 못하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대신 국가 전체적으로 중장기 구조조정에 주력하고 있다. 구제금융 지원이 끝나는 2012년 말부터는 정부와 은행이 시장에서 자금을 자체 조달해야 한다. 정부소유 부동산 매각 등이 가능해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 작년 그리스는 재정적자 규모를 140억유로나 줄였는데 이는 어느 나라도 하지 못한 일이다."

아테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유럽 재정위기 어디까지 확산될까

유럽의 위기는 PIG로 그칠 것인가, PIGS가 될 것인가. 혹은 그리스에 또 다른 위기가 닥쳐 PIGGS까지 갈 것인가.

G(그리스)와 S(스페인)에 닥친 불확실성이 또 다시 유럽경제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리스에서 시작돼 아일랜드(I)를 거쳐 포르투갈(P)로까지 이어진 연쇄적 재정위기가 어디까지 확산될 지는 세계경제 초미의 관심사다.

세계의 시선은 또 한번 그리스로 쏠리고 있다. 그리스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에 부채상환연장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18일(현지시간) 현지 언론에 보도된 것. 막대한 재정 적자 탓에 구제금융을 받은 그리스가 빌린 돈마저 제대로 못 갚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곧바로 그리스 국채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66bp 상승한 1,221bp를 기록했다. 이 수치는 그리스가 5년 안에 채무불이행에 빠질 가능성이 64.5%로 높아졌다는 뜻.

안남기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부채 자체(총부채 3,000억 달러 추산)가 많고 이자율(10년 만기 국채수익률 12%)도 높아 현재 상황을 지탱하기가 어려 채무 조정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포르투갈이나 아일랜드 역시 ▦기존 채무가 많고 ▦재정적자는 과도한데 ▦조달금리가 높아 신규 대출도 일으킬 수 없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은 유로존 4대 경제대국인 스페인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포르투갈이 6일 EU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면서 불확실성이 일부 해소됐다는 관측도 있었지만, 포르투갈 위기가 인접국인 스페인에 위기 바이러스를 전파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유사시 스페인 한 곳에만 4,000억유로(약 622조원)가 구제금융으로 투입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독일이나 프랑스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유로존 전체의 심각한 위기 상황이 될 거란 얘기다.

이종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PIG의 구제금융은 위기의 해결책이라기보다 회복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줬다는 의미일 뿐"이라며 "6월을 전후한 스페인의 상황은 유럽 미래에 중대 기로가 될 것"이라 분석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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