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유럽式 포퓰리즘 정책·정부 모럴해저드가 곳간 거덜냈다
#.그리스에서는 지난해 구제금융 전까지 미성년 자녀를 가진 15년 이상 직장생활자라면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20대 초반에 일을 시작했다면 30대 중반에 벌써 연금혜택을 누렸던 셈. 정권을 잡은 정치인들이 표를 대가로 연금대상을 마구잡이로 늘린 결과다. 아테네에서 만난 한 교민은 "우리가 보기엔 참 황당하지만 유럽 선진국에도 없는 이런 제도를 그리스인들은 오랫동안 당연히 여기며 살았다"고 전했다.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위기는 '정치가 부른 참극'이었다. 평등과 복지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풍토가 정치인들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과 결합하면서, 나랏돈을 흥청망청 써버렸던 것이다.
그리스는 유럽 내에서도 대표적인 포퓰리즘 정치로 유명하다. 내전과 쿠데타 등 오랜 혼란 끝에 1981년 처음 집권한 사회당(PASOK)은 이후 정권 유지를 위해 적극적인 인기영합정책을 펼쳤다. 노조 지도부를 당에 포섭하는 건 예사.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공공부문 일자리를 약속하며 표심을 자극했다.
단적인 예가 바로 그리스의 엄청난 교원 규모다. 2007년 기준 중등교사 1인당 학생수는 7.5명. 교육의 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 최고로 꼽히는 핀란드(13.1명)에 비해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정부가 일자리 확대 차원에서 교원을 지나치게 많이 임용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겠지만, 나라는 가난한데 교사만 넘쳐난다는 것은 비정상이 아닐 수 없고, 이 자체가 방만한 공공부문의 상징이다.
정부의 모럴헤저드(도덕적 해이)도 심했다. 이번 위기의 도화선이 된 재정적자 규모 은폐는 2001년 유로존 가입 때도 썼던 수법. 2000년 당시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103.4%)가 유로존 가입기준(60%)을 훨씬 초과하자 그리스 정부는 재정통계를 조작해 심사를 통과했다. 벨기에 브뤼셀 소재 유럽정책연구센터 신시아 알시디 연구원은 "그리스는 정치인에게 재임 기간중 광범위한 면책특권을 주는 법적 특성 때문에 모럴헤저드가 심해진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포르투갈의 정치문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 90년대 연평균 2.8%에 이르던 노동생산성 증가율이 2000년대 들어 0.7%까지 크게 낮아졌는데도 정치권과 국민들은 개혁에 둔감했다. 유럽국가 중 가장 높은 실업급여 수준(재직중 소득의 40% 이상)에다, 산별 노조의 단체 임금협상으로 임금 하락은 거의 없었던 결과다. 유로존이라는 보호막 안에 들어왔다는 안도감이 누적되는 체질약화 요인들을 외면하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많다.
여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정치 풍토는 이번처럼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대응도 더디게 한다. 지난 6일 전격 발표된 포르투갈의 구제금융 신청방침은 사실상 3월말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구제금융의 족쇄를 피해보고자 집권당이 마련한 긴축재정안이 3월24일 거대 야당연합의 거부로 의회에서 부결되자 시장은 당장 "이제 구제금융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해석하기 시작했다. 당시 들끓는 여론을 등에 업고 긴축안을 거부한 덕에 오는 6월 총선에서 차기 총리 당선이 유력해진 야당당수가 향후 협상에서는 어떤 자세로 나올 지도 관심이다.
금융권 부실이 국가재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던 아일랜드 역시 구제금융 결단이 조금 더 빨랐다면 위기 극복에 필요한 조달금리를 지금보다 낮출 수 있었을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준 수석연구원은 "남유럽 국가들은 특히 2000년대 들어 정당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여야 모두 지지율을 떨어뜨릴 수 있는 개혁정책을 외면한데다 글로벌 호황의 영향으로 고성장을 구가하면서 개혁의 절박함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브뤼셀ㆍ아테네=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 인터뷰/ 스투르나르스 그리스 경제산업연구소장
그리스 유일의 경제관련 독립 씽크탱크인 경제산업연구소장이자 국립 아테네대 교수인 이오아니스 스투르나르스(사진) 박사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위기는 정권 유지를 위해 원칙과 포퓰리즘을 오간 정치인들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구제금융을 받고 있는 지금 정부 내에서도 개혁파와 대중영합파의 힘겨루기가 치열하다고 전했다.
-그리스 재정위기에 정치인들의 책임도 적지 않아 보인다.
"나랏빚이 급증한 원인은 무엇보다 국가 조직이 너무 비생산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특히 2004~2008년 사이 민주당 집권 시기에 큰 문제가 있었다. 보수정권이 왜 그토록 서민 인기정책에 치우쳤는지, 이는 앞으로 역사학자들도 평가해 볼 문제다."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이 문제였나.
"애초 정권을 잡을 때 민주당 공약은 원래 보수주의 이념대로 ▦정부축소 ▦자유경쟁 확대 ▦일자리 창출 등이었다. 그런데 공무원만 10만명을 더 채용하는 등 오히려 정부조직을 더 확대했다. 현재 그리스 경제상황은 거의 구소련과 비슷할 정도로 경쟁이 없다고 본다. 그리스의 비즈니스 환경 순위는 지난 정권 초기 세계 50위권에서 지금은 100위권으로 추락했다. 자유경쟁만 늘려도 GDP가 17% 정도 늘어날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갖고 있다."
-비단 민주당의 문제만은 아닐 텐데, 포퓰리즘 정치가 그리스의 오랜 전통인가.
"오토만 제국에서 독립한 이후부터 그리스 정치인들은 늘 두 정체성 사이를 오갔다고 볼 수 있다. 대중의 지지는 적지만 국가를 현대화 시키느냐, 아니면 인기영합을 택하느냐였다. 문제는 곧은 신념을 가진 정치인이라도 현실에선 종종 힘을 쓰지 못했다는 점이다. 지난 5년간 총리를 지낸 콘스탄티누스 카라만리스 역시 개인적으로는 현대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공무원을 늘리고 연금혜택을 확대했던 당내 인기영합파에 밀리고 말았다."
-총리가 힘에서 밀렸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국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 아니었겠는가. 바코야니 전 외무장관은 끝내 현대화를 주장하다가 당을 떠나기도 했다."
-현 정부는 어떤가.
"현 파판드레우 총리 역시 당내에서 현대화 지지세력과 대중영합 세력 간에 갈등을 많이 겪고 있다. 총리는 개인적으로 현대화를 주장하는 쪽이지만."
아테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 정권교체 부르는 구제금융/ 아일랜드·포르투갈, 집권당 붕괴 도미노
남유럽 재정위기를 거치며 '구제금융=정권교체'는 이제 공식으로 굳어졌다. 1997년 11월 한국의 구제금융 사태가 다음달 대선에서 야당후보(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졌듯, 재정위기를 맞은 나라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집권당이 정권을 내놓는 경우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유럽은 정부 수반 임기가 보장되지 않는 내각제 국가가 많아, 위기는 곧바로 정권의 붕괴로 이어진다.
대표적 사례가 아일랜드. 14년을 장기 집권하며 켈틱 타이거(Celtic Tiger)로 불린 아일랜드의 번영을 주도해 온 공화당은 구제금융 사태를 맞으며 2월 총선에서 허무하게 정권을 내줬다. 2009년 반대 여론에도 불구 EU의 헌법 격인 리스본 조약의 국민투표 통과를 이끌며 리더십을 과시한 브라이언 코웬 전 총리도 권좌에서 내려왔다.
구제금융을 거부하다 이달 초 끝내 유럽연합(EU)에 도움을 요청하며 무릎을 꿇은 주제 소크라테스 포르투갈 총리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지난달 말 정부가 제출안 재정긴축안이 세번째 부결된 책임을 지고 사임 의사를 밝힌 것. 포르투갈은 6월 5일 조기 총선을 실시할 예정이다.
핀란드는 자국이 위기를 맞지 않았지만 집권당이 남유럽에서 날아온 유탄을 맞은 경우. 17일 총선에서 다른 국가에 구제금융을 지원해야 하는지가 이슈로 떠올랐고, 구제금융에 반대한 극우정당 트루핀스(진짜 핀란드인)당이 제3당으로 약진했다. "우리가 저 먼 남유럽에까지 세금을 대야 하냐"는 국민정서를 파고든 것. 41세 여성 총리 마리 키비니에미가 이끄는 중도당은 제4당으로 추락했다.
할아버지ㆍ아버지에 이어 3대째 총리에 오른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는 매우 이례적으로 자리를 지킨 경우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의 특수 상황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김득갑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은 "서유럽 은행들의 무분별한 대출 때문에 구제금융이 닥쳤다는 게 그리스의 바닥민심"이라며 "구제금융을 받으면 복지가 줄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좌파인 사회당에 대한 정권교체 압력이 크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영창 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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