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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혁명 51주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가자 105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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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혁명 51주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가자 105명 인터뷰

입력
2011.04.18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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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19일 당시 광주에서 이발사로 먹고 살고 있었다. 지역 고교생들 중심으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말을 손님한테 들었는데 나도 모르게 피가 끓었다. 비록 이발사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가 부정선거로 유린되는 것은 볼 수 없다고 생각해 동료들과 함께 시위 현장인 금남로 광주경찰서 앞으로 갔다. 그런데 갑가지‘탕탕탕’소리가 났다.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한 것이다. 나도 경찰관이 휘두른 곤봉에 머리가 깨지고 다리가 부러졌다. 하지만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한 채 피를 철철 흘리면서 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치료를 위해 육군 77병원으로 옮겨진 것은 한밤중이었다. 그곳에서 며칠 후 평소 안면이 있던 동네 기자에게 이승만 대통령 하야 소식을 듣고 모두 만세를 외쳤다”(정동채ㆍ7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4ㆍ19혁명 51주년을 맞아 참여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소개하는 웹페이지 4월혁명구술아카이브즈(http://oralhistory.kdemocracy.or.kr)를 19일 개설했다. 아카이브즈에는 사업회가 지난해 2월부터 12월까지 전국을 돌며 당시 고교생 대학생 시민 기자 군인 등 모두 105명으로부터 청취한 181시간 분량의 구술 내용이 들어 있다.

특히 당시 고교생들의 시위는 우연이 아닌 조직적 준비와 계획에 의해 치밀하게 진행됐다는 증언도 담겨 있다. 배극일(71)씨는 당시 대광고 3학년 대대장으로 4ㆍ19혁명을 맞았다. 그는 “4월 18일 7교시가 끝난 뒤 고려대생들이 피를 흘리며 학교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우리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다음 날 거사를 벌이기로 했다”며 “함께 집에 가서 결의문을 작성하고 포대로 플래카드도 제작했다”고 말했다. 대광고 학생 1000여명 중 800여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이후 이 대통령의 하야 발표 전까지 계속 시위 현장에 남아 있었다.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은 미국에 군사 유학을 세 차례 다녀오며 익힌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당시 송요찬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관 전속부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자유당 정권과 경찰이 무력 사용을 계획했던 것 같다”며 “경찰이 육군에 칼빈 총탄 10만발을 요청해 왔으나 송 계엄관은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사업회 관계자는 “당시 현장을 객관적으로 접했던 군인 학생 등의 진술은 4ㆍ19혁명의 기록을 보다 풍부하게 해 주는 소중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정원기자 sj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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