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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강의를 찾아서]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권력과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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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강의를 찾아서]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권력과 인간'

입력
2011.04.15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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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를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융성했으며 외부의 침략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대를 이끈 영조(1694~1776)와 정조(1752~1800)는 훌륭하고 완벽한 성군이었을까. 정병설(46)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절대권력에 젖어 인간성이 뒤틀린 왜곡된 사람들"이라고 평했다.

정 교수가 올해 초 네이버 문학동네 카페(http://cafe.naver.com/mhdn)에 연재를 시작해 연말까지 이어갈 온라인 강의의 제목을 '권력과 인간_사도세자 죽음의 진실'로 정한 것도 영조, 사도세자(1735~1762), 정조 3대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뜻에서다. 그가 연재에서 가장 큰 근거로 사용한 사료는 혜경궁홍씨(1735~1815)의 한중록(閑中錄)이다. 혜경궁홍씨는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생모인데 이 책은 그가 궁중의 최고 위치에서 내려다본 적나라한 모습을 담고 있다.

콤플렉스에 시달린 영조

영조는 출생과 죽음의 콤플렉스에 짓눌린 사람이다. 왕의 자식이었지만 생모가 무수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신하들은 뒤에서 그의 출생을 놓고 숙덕거렸고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이복 형 경종이 세자로 책봉돼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되지 못하는 왕자는 죽음을 면할 수 없었으니 태어나면서부터 그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영조에게는 행운이 따랐다. 경종이 병약하고 후사도 없어 극적으로 세자가 된 것이다. 정 교수는 "영조는 마음 고생을 하고 어렵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제 정신으로 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조가 나이 마흔 둘에 아들을 얻었다. 늦게 얻은 아들인지라 기쁨은 남달랐다. 그러나 그 기쁨은 피붙이를 얻었다는 데서 온 게 아니라 나라를 맡길 후계자를 얻었다는 데서 온 것이었다. 그래서 사도세자가 두 살 때부터 지도자 교육을 시켰다. 하지만 노력파인 자신과 달리 아들은 공부에 영 흥미가 없었다. 나라 걱정으로 삐쩍 마른 자신과 달리, 아들은 소아비만이 될 정도로 밥 먹는 것을 좋아했다. 열명 정도의 스승을 붙여 공부를 시켰지만 아들은 그것을 힘들어했다. 영조가 때때로 사도세자를 시험했는데 아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도세자가 열 살이 넘도록 공부에 소질을 보이지 않자 영조의 태도는 점차 공격적으로 변한다.

영조의 태도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세자를 호위하던 익위사 관리가 고향인 전남 강진으로 내려갈 때 사도세자가 "즐거운 것이 세상에 많지만 그 중 가장 즐거운 것은 독서"라는 내용의 시를 써주었다. 그 신하는 고향에서 세자가 써준 시를 자랑했고 그것을 본 그 지역 출신의 선비가 한양으로 발탁돼 영조를 만났을 때 그 사실을 이야기했다. 영조는 코웃음을 쳤고 나중에 사도세자를 나무랄 때마다 그 시를 거론하며 꾸짖었다. "책 읽기를 그토록 싫어하는 주제에 뭐, 독서가 가장 즐겁다고? 그것은 그 신하를 속이는 것일 뿐 아니라 호남 사람 전체를 속이는 것이야. 그런 거짓말이나 하고…"

영조는 나라를 맡길 사람이 필요했지만 아들은 그런 자질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져 사도세자가 17살 무렵부터는 대면도 거의 없었다. 기대를 포기했기에 영조는 더 이상 꾸짖지도 않았다. 그런 세월이 10년 이상 지속되면서 사도세자는 점차 미쳐갔다.

영조가 아들에게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1761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3정승이 한 달 간격으로 숨진 적이 있는데 당시 영의정 이천보(1698~1761)는 죽기 직전 "임금님, 화 좀 그만 내십시오. 그렇게 화를 내면 당신에게도 해롭고 나라에도 좋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영조가 걸핏하면 화를 내고 성질을 부렸던 사실을 보여주는 것인데, 정 교수는 "영조는 정상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미쳐가는 사도세자

사도세자는 책보다 시와 그림을 좋아했다. 칼과 무예도 좋아했는데 아들 정조가 그것을 물려받았다. 타고난 기질이 그런데도 공부를 강조하는 아버지 때문에 결국 미치고 만다. 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 칼을 만든 장인의 머리를 잘랐고 피가 줄줄 흐르는 내관의 목을 부인 혜경궁홍씨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공격적 강박증을 드러내기 전에도 자살을 시도하고, 옷에 집착하는 의대증(衣帶症)을 보였다. 의대증은 복장 때문에 영조로부터 야단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다.

어차피 미친 사람을 영조가 굳이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 정 교수는 "미친 아들을 죽이는 게 바로 권력"이라고 말한다. 사도세자가 미쳤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친 그에게도 영특한 아들(정조)과 자기 세력이 있었다. 게다가 칼까지 좋아했다.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어느 날 밤 청계천 물길을 따라 칼을 들고 나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 교수는 그가 아버지를 죽이려 했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상황이 그랬으니 영조가 아들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 교수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노론과 소론의 갈등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당쟁이 아니라 그저 제 정신이 아닌 왕과 그 아들이 보여준 미친 행동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스트 군주 정조

개혁군주 또는 성군으로 알려진 정조가 실은 대단한 음모가였다는 주장이 2009년 나왔을 때 많은 사람이 놀랐다. 하지만 정 교수 역시 그런 논리에 동조했다. 정 교수는 심지어 "혜경궁홍씨가 아들인 정조를 가장 미워했을지 모른다"고까지 추측한다.

그가 그렇게 가정하는 한 사례.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외가가 연루돼 있다고 보고 신하들을 부추겨 어머니의 숙부 그러니까 자신의 작은 외조부 홍인한(1722~1776)을 공격하게 했다. 겉으로는 말리는 척 하다가 결국에는 "어머니도 허락했다"며 홍인한을 공격했다. 혜경궁홍씨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나.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서 한다"고 아들 정조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정 교수는 "자기 편으로 생각했던 아들의 이런 태도가 혜경궁홍씨를 더 힘들게 했을 것"이라며 "정조는 거짓말을 밥 먹듯 했던 임금"이라고 말한다.

정조의 성품을 드러낸 또 다른 사례가 삼불필지(三不必知) 사건이다.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고자 하면서 신하들에게 "동궁(정조)이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누가 돼야 하는지 아느냐, 동궁이 국정을 아느냐, 동궁이 당파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에 홍인한이 "임금(영조)께서 (지금처럼) 하시면 되며 동궁이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나중에 권력을 잡은 정조가 이를 두고 자신의 등극을 막았다는 이유로 미워했다는 것이다. 혜경궁홍씨는 정조가 자신이 젊었을 때 기생과 놀아나는 것을 외가에서 싫어했다는 이유로 외가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도 한중록에 적고 있다.

강한 정신력을 지닌 혜경궁홍씨

그렇다면 혜경궁홍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정 교수는 "정신력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겨우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사도세자와 혼인해 궁궐에 들어왔다가 모질고 험한 꼴을 보면서도 여든 한 살까지 살았기 때문이다.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궁 안의 참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 혜경궁홍씨 역시 옹고집 시아버지와 미친 남편 때문에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고, 친정의 몰락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하고도 80년 이상을 생존했으니 정신력이 무척 강했을 것이라는 게 정 교수의 생각이다.

정 교수는 궁에서 태어나고 생활하는 임금 집안과 달리, 혜경궁홍씨처럼 궁 밖에서 태어난 사람은 설사 나중에 궁에 들어와 살더라도 어느 정도 사회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사건들이 궁궐에서는 비일비재했다.

■ 한중록의 사료적 가치/ "혜경궁 홍씨는 정확하고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정병설 교수는 한중록 전문가다. 6년 이상의 연구 끝에 2010년에는 한중록을 현대어로 번역해 출판했다. 그는 18세기 정치사를 가장 잘 꿰뚫는 혜경궁홍씨가 자신이 겪은 첩첩한 아픔을 절실한 필치로 적은 소중한 책이라고 소개한다.

한중록에 대한 일반의 시각은 혜경궁홍씨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부추겼다는 공격으로부터 자기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썼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병설 교수는 설사 그런 면이 있다 해도, 그것이 책 내용이 틀렸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아가 "한중록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과 비교했더니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가 궁으로 들어오는 시간에 혜경궁홍씨의 아버지 홍봉한(1713~1778)이 어디 있었는지에 대한 기록만 다를 뿐 나머지는 모두 일치했다"며 한중록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했다.

한중록은 혜경궁홍씨의 글 세편을 누군가가 모아 낸 책이다. 그 중 한편은 환갑 때 일생을 돌아보며 쓴 것이고 나머지 두 편은 친정에 가해진 공격에 해명하기 위해 썼다. 그 중 사도세자에 대한 글은 그의 죽음에 자기 집안은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러자면 사도세자가 미친 사람이고 그래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해야 한다. 실제로 그 글은 광인(狂人)이 되는 내면의 변화를 시간 순으로 자세히 그리고 있다.

또 맑고 깨끗한 관리로 알려진 김종후가, 홍국영이 실권을 잡고 있을 때는 호랑이와 표범이라고 치켜세웠다가 그가 역적으로 몰리자 돌변해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등 관리들의 치부도 적나라하게 묘사돼있다.

● 약력

1965년 경남 함양 출생

1988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1997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

1999~2003년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4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 <나는 기생이다_소수록읽기> <구운몽도_그림으로 읽는 구운몽> <조선의 음담패설> 등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사진 신상순기자 sssh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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