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명회 단 한번에 녹색마을 선정… 민들 "신문 보고 알았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토박이 변진식(49)씨는 요즘도 대문 밖을 나설 때면 '형님 누님'을 만나게 될까 주저한다. 가족처럼 지내던 이장, 부녀회장과 지난해 바이오매스시설 설치 여부를 두고 크게 다툰 이후 사이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 바이오매스 시설은 가축분뇨, 음식물쓰레기를 투입해 연료, 전기 등의 에너지를 만드는 공장.
변씨는 당시 "하루에도 몇 번씩 분뇨와 쓰레기를 나르는 트럭이 마을을 통과할 텐데 악취로 고생할 주민들에게 한마디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고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변씨를 비롯한 일부 주민이 행정소송까지 제기하자 공주시는 옆 마을(금대리)로 옮겨 재공모 절차에 들어갔다.
사업은 백지화됐지만 월암리 내부의 앙금은 여전히 남아있다. 찬반으로 입장이 갈렸던 주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을회관 식당 체육관에서 얼굴을 마주치면 서로 피하기 바쁘다. 변씨는 "바이오매스가 뭐라고 순박한 시골사람들을 이렇게 들쑤셔 놓는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월암리에 바이오매스 시설이 들어설 뻔했던 것은 이 마을이 지난해 1월 행정안전부, 환경부, 농식품부, 산림청 등 4개 부처가 주관한 저탄소녹색마을(이하 녹색마을) 시범사업지역으로 선정됐기 때문. 녹색마을은 주민들이 재생에너지 생산시설을 직접 운영하고 에너지를 생산ㆍ소비하는 '에너지 자립형 지역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취지로 추진된 정부의 신재생에너지 보급사업. 태양광을 이용하는 그린홈 및 그린빌리지에 이어 추진하는 것으로 2020년까지 600개 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는 하향식 체계로는 에너지자립마을이 장밋빛 전망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정부의 에너지자립마을 역할모델인 독일 윤데 마을의 경우 사업 추진에만 무려 7년이 걸렸다. 주민들이 참여를 결정하고 운영방법을 논의하는데 걸린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런 뒤에야 바이오매스 시설이 들어섰다. 정부가 사업설명회 한번으로 동의서에 도장을 찍게 하고 부지를 선정하는 우리와는 출발부터가 다르다.
월암리 주민 다수는 녹색마을 선정 사실을 언론보도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 이병길(55)씨는 "우리더러 시설을 운영하라면서 어떻게 한마디 의견도 묻지 않느냐"며 "일을 추진하는 공무원들이 참 대단하다"고 황당해했다.
공주시는 사업 추진 과정에 주민 의사를 반영하는 일이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공주시 관계자는 "한달 만에 사업계획서를 준비하느라 360여명 전체 주민의견을 들어볼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며 "마을 개발위원 등 20여명의 찬성을 바탕으로 추진했고 나머지 주민들은 차차 설득해 나가려 했다"고 해명했다.
사업을 공모한 행안부도 주민들 의사를 소홀히 하긴 마찬가지였다. 행안부가 사업자를 결정하는 평가항목에서 주민동의 비율은 불과 10%. 반면 같은 사업주체인 환경부는 무려 25%나 된다. 행안부 관계자는 "1차 시범사업지역인 월암리가 무산되는 걸 보고 2차 사업부터 주민동의 항목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말했다.
올 1월 그린빌리지로 선정된 전북 부안군 화정마을에서 태양광판 설치 이후 집집마다 전기장판, 선풍기형 라디에이터 등 전열기를 구입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마을 주민 김인택(49)씨는 "한 달에 3만~4만원 하던 전기료를 거의 부담하지 않게 되자 노인들 사이에 전열기 구매바람이 불었고 자식들까지 합세했다"며 "에너지 절약 등 사전 교육 없이 시설만 덜컥 보급되다 보니 신재생에너지를 통해 얻고자 했던 환경적 가치에 역주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더욱이 태양광 시설은 누진세 적용을 받지 않아 에너지 낭비를 부추긴 요인이 됐다. 주민들이 주체로 적극 참여할 수 없는 구조이다 보니 재생에너지 시설 설치 후 나타난 부작용이다. 진상현(행정학) 경북대 교수는 "에너지 절감을 해보자고 설치한 신재생에너지 시설이 오히려 에너지 낭비를 부추기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그린빌리지 보급사업을 담당하는 에너지관리공단 신재생에너지센터 관계자는 "시설 이용에 관한 안내자료만 따로 배포할 뿐 에너지 절약 등 교육 프로그램은 예산부족으로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게다가 정부의 화려한 구호와는 달리 재생에너지 시설이 고장 난 채로 2년여 동안 방치된 경우도 있다. 2005년 국토 최남단 마라도에 설치된 150kW 태양광발전기는 2008년 여름 낙뢰로 인버터(전류변환장치)가 고장 났지만 그냥 내버려뒀다가 올 초에야 재가동하기 시작했다.
마라도 발전소에 근무하는 정순철(55)씨는 "태양광발전기가 가동되는 동안에도 고장이 자주 나 주민들 사이에서는 돈 먹는 하마라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마라도는 실제로 태양광발전기를 전면 수리해 정상가동 시키는 대신 소형 화력발전에 쓰이는 200kW 디젤발전기 1대를 들여와 전력을 충당했다.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우리가 왜 신재생에너지를 이용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에너지 교육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공주=강윤주 기자 kkang@hk.co.kr
■ '그린빌리지' 성공사례 전북 중금마을 가보니
전북 임실군 중금마을 주민들은 2010년 그린빌리지를 신청해 태양광발전기를 설치했다. 2009년에도 시도했지만 주민 반응이 시원치 않아 보류됐다. 중금마을 주민 김정흠(45)씨는 "신재생에너지 시설이 왜 우리 마을에 필요한지, 환경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을 다 고려해 1년간 주민들끼리 토론하는 작업을 거쳤다"고 말했다.
마을에 들여올 에너지원도 주민들이 꼼꼼히 따져보고 결정했다.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 동네 특성상 풍력은 처음부터 탈락, 운영비가 많이 나오는 지열과 보조난방이 따로 필요해 비효율적인 태양열이 제외되고 결국 태양광이 낙점됐다.
전문가들은 에너지자립마을을 제대로 이루려면 중금마을처럼 주민들 주도로 사업이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금마을 주민들은 사실상 모두가 '에너지 박사'들이다. 그린빌리지 신청 이전부터 주민들 스스로 에너지 절약과 교육을 한 덕이다.
중금마을 한가운데에는 농약병 폐비닐 등 종류만 12개에 달하는 분리수거함이 설치돼 있다. 2008년 주민들 스스로 '쓰레기 없는 마을'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해 만든 것이다. 작은 부분이지만 직접 에너지 절약을 실천해본 효과는 컸다. 시큰둥하던 일부 주민도 빈병 폐지 등으로 나온 수익금이 마을 공동경비로 쓰인다는 사실을 알고 함께 참여하기 시작했다.
분리수거의 성공에 힘입은 주민들은 에너지대책위원회를 꾸리고 한 시민단체로부터 전문적인 에너지 효율 개선 교육과 조언도 받았다. 그 결과 집 안의 백열등을 고효율 전구로 바꾸고 멀티 탭 콘센트를 설치하고 절수형 샤워꼭지로 교체하는 등 에너지를 아낄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살필 수 있었다. 에너지 효율개선을 위해 집수리도 했다.
2009년 집수리 혜택을 받은 이순자(80)씨는 "문풍지 창문과 현관문을 단열제품으로 교체하고 흙벽을 헐고 스티로폼과 합판을 덧댄 것만으로도 집이 몰라보게 따뜻해졌다"고 만족해했다.
녹색연합 이유진 홍보팀장은 "저탄소 녹색마을에 지원하는 예산이 300억원이 넘는데, 시설 설치에 앞서 에너지 교육 프로그램이나 집수리 사업 등에 먼저 예산을 투입해 에너지 자립마을의 '자립 토대'를 닦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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