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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관료가 상전이다

입력
2011.04.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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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부질문에 출석하지 않은 최중경 지경부 장관의 버릇을 고치겠다고 온 국회가 들고 일어났다. 여야가 한 목소리로 목청을 높이고 있는 최 장관의 국회 불경죄는 대정부질문 불출석이 문제는 아니다. 예의를 갖춰 사유를 알려야 하는데, 출국 4시간 전에야 해외출장을 통보한 후 일방적으로 비행기를 탔다는 것이다.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12일 징계 차원에서 열린 최 장관 단독 긴급현안질문에서 "국민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이라고 질타했다.

착잡하다. 하는 일 없는 '국회의원 나부랭이'들이 원전 수출을 위해 비행기에서 새우잠을 자며 불철주야 세계를 누벼야 하는 '대한민국 장관님'을 굳이 불러 '꼰대노릇'이나 하려는 게 꼴사나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초임 장관 한 명을 불러 세우는 데 여야 원내총무가 힘을 합쳐 '국민에 대한 예의'까지 들먹여야 할 정도로 우리 관료의 위상이 어느새 하늘을 찌르게 됐구나 하는 씁쓸함 때문이다.

하늘을 찌르는 기고만장

비슷한 느낌을 줬던 사건은 3월에도 있었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강만수 산은금융지주 회장 겸 산업은행장의 연봉을 "두 배 이상 올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공공연히 바람을 잡고 나섰다. 그는 대통령 경제특보를 지낸 정권 실세이자 '모피아(MOFIA)' 선배인 강 행장에 대해 "삼고초려 끝에 어렵게 모셨다"며 현재 5억원 정도인데, 10억원 이상으로 올리자는 얘기를 술술 풀었다. 물론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지만 핵심 금융관료의 한 사람이, 유사시 국민의 혈세가 투입되는 공기업 CEO를 맡은 선배 관료의 연봉을 제 곳간에서 꺼내주듯 거리낌 없이 올리겠다니, 기고만장도 보통이 아니라 '방귀 뀌고 구름까지 치솟은 격'이다 싶었던 것이다.

어느새 관료들이 상전이 됐다. 공복(公僕)이라는 말은 아련해진 지 오래고 이젠 거의 조선시대 관존민비(官尊民卑) 수준이다. 그것도 왕까지 없으니 무서울 게 없고, 무서울 게 없으니 일은 헐렁헐렁 제멋대로다. 외교 협정문은 오역투성이로 국회에 오르고, 상하이 총영사관은 '사랑놀음'에 날 새는 줄 몰랐다. 고용부는 실직자 예산 2,000억원을 돌려 '낙하산 자리'용 초호화 건물이나 짓고, 자기들만 건보료 좀 덜 내겠다고 법제처는 거리낌 없이 '꼼수'나 부리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관료의 힘과 위상은 점점 더 강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대체적인 주장이다. 행정의 복잡성, 정보의 폐쇄성, 업무 전문성 등에 따라 행정부를 장악한 정치권력이든 의회든 관료를 능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기 때문에 국가 운영에서 관료의 주도권이 강화된다는 얘기다. 오죽하면 '의회민주주의는 관료가 내린 결정과 판단을 의회라는 장치를 통해 시민 자신이 결정하고 판단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장치'라는 헤겔의 통찰이 나왔겠는가.

하지만 역대 정권에서도 관료들의 기고만장이 요즘처럼 하늘을 찔렀을까. 아닌 것 같다. 박정희 대통령 때의 관료는 근대화를 이끈 열정의 기관차였지만, 정치권력의 충실한 실무자로서 그 임무를 수행했다. 전두환ㆍ김영삼ㆍ김대중 대통령 시절을 지나면서 관료의 힘과 역할은 크게 신장됐으나 정치적 권위가 여전히 압도했다. 그러던 게 노무현ㆍ이명박 대통령 시대로 접어들면서 어느새 정치권력이라는 게 관료들에게 별로 거리낄 것도, 무서울 것도 없게 된 느낌이다.

정치적 권위의 회복 시급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의 일개 비서관이 국회의 공식석상에서 의원들에게 핏대를 올리는 걸 보면서 미구에 오늘날 같은 현상이 벌어지리라고 예감했다. 당시 언론의 비판을 당파적 이해(물론 그런 경우도 있었다)로 몰아붙이며 묵살할 때, 조만간 정치적 권위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도 짐작했다.

이 정부 들어 도대체 국정철학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 헷갈리는 혼돈상태가 끝없이 되풀이되면서 이런 정치권력을 누가 무서워하겠나 하는 씁쓸함을 씹어야 했다. 모든 게 정치가 못난 탓이고, 국회가 제 일을 못해 빚어진 사태다. 정치가 정당한 권위를 되찾지 못하면 조만간 관료가 대통령 노릇까지 하겠다고 나설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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