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7> '장화홍련전'(1956)과 특수효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정창화 감독의 액션영화에 바친 60년] <7> '장화홍련전'(1956)과 특수효과

입력
2011.04.11 17:31
0 0

장화·홍련이 하늘로 솟아오를 땐 와이어 대신 널뛰기로 '쓰~윽'계모 익사 장면 촬영하다 석금성 진짜 익사할 뻔CG 등 첨단 장치 없어 특수효과 표현 방법 고심열악한 환경에서 밤잠 설친 노력 결실 맺어 뿌듯

대배우 석금성이 익사할 뻔한 '장화홍련전'(1956)과 특수효과

영화 '장희빈'으로 초대 장희빈이 된 김지미는 이후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수 없이 장희빈 이미지의 변주와 재평가가 이뤄졌음에도 명실공히 최고의 장희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그려진 장희빈의 악녀 이미지와는 처음부터 차별적으로 접근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는 장희빈을 단순한 악녀보다는 거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매혹하는 '팜므파탈'(femme fatal)로 드러내기를 원했다.

장희빈이 떡을 먹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그 떡 하나하나가 너의 정적이다. 그 떡 하나씩 씹을 때마다 정적을 씹는 기분으로 잘근잘근 씹어라"라고 김지미에게 요구했다. 그 장면을 극장에서 본 관객들은 감탄을 연발하며 적극 호응했다. 치명적이리만큼 아름다운 얼굴에서 은유적이고 완곡하게 독기가 배어나오니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장희빈'에 대한 평단과 관객의 반응이 아주 좋았고 여러모로 성공한 작품이 되었다. '정말 전화위복이다. 도금봉을 썼으면 요염한 장희빈이 될 수 있었을지 몰라도, 김지미에게서 나오는 그런 아름답고 멋있는, 독기 품은 장희빈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개봉 뒤 느낀 소회다.

인생이나 영화나 전화위복(轉禍爲福)이요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할 수 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내 영화인생은 위험부담이 컸고, 새옹지마라 할 일도 유독 잦았던 것 같다. 한국영화 암흑기인 1970년대에 홍콩으로 진출한 것도 그렇고, 홍콩 영화계가 한창 무협영화에 몰입되어있을 때 그들이 시도하지 못한 것을 외국인의 시각에서 '창조적 해석'을 모색해 이후 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영웅본색' 등 홍콩 현대액션영화의 맹아가 된 점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장희빈'의 김지미처럼 뜻밖의 캐스팅으로 성공한 '죽음의 다섯 손가락'도 마찬가지였다. 악인 이미지였던 평범한 외모의 로례(羅烈)를 기용하여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성공으로 이끈 것도 결국 모험과 창조를 좇다 보니 생겨난 전화위복이요 새옹지마였다. 결국 새옹지마도 우연만으로도 이루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난 행운에 의지하기보다는 강직하고 타협하지 않는 길이 나답고 맘 편한 내 길이라 생각하며 고집스럽게 살아왔으니까.

다시 6ㆍ25 전쟁이 끝나고 환도한 뒤 서울 명동의 모나리자 다방으로 돌아가 보자. 문인, 예술인, 지식인들과 공존하던 모나리자 다방이 점차 북적거리게 되자 우리 영화인들끼리 모이는 장소를 찾아 나서게 됐다. 충무로 3가에 있는 스타다방과 태극다방, 청맥다방 등지로 둥지를 옮겼다. 새 둥지라고 해도 역시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 음악과 커피를 벗삼아 불안을 위로 받고 작품 의뢰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이 충무로의 다방이 어찌 보면 전후 한국영화 전성기를 꽃피우게 되는 온실이기도 했다.

다방은 절망의 늪에 빠진 예술가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위로를 받는 내밀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인력시장처럼 자신을 드러내놓은 공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영화인들은 충무로의 다방에서 작품을 의뢰 받았고 작품에 대해 토론하고 비평하며 서로의 희로애락을 나누었다.

어느 날이었다. 웬 사람이 나를 찾아와 "작품을 하나 하고 싶은데 감독을 맡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장화홍련전'(1956)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작품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었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흔쾌히 제의를 받아들였다. 출연자는 이경희, 추석양, 서월영, 정애란, 조항이었고, 촬영은 그때 일본에서 막 돌아온 김영순, 조명은 최인규 감독과 함께 고생했던 함완섭이 맡았다.

프랑스제 카메라 '발보'를 사용하여 2월에 촬영에 들어갔다. 시작부터 날씨가 걸림돌이었다. 날씨만 추워지면 카메라 모터가 얼어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시녹음 때나 사용하는 카메라 방음용 덮개 '블림프'를 사용했어도 당시 2월은 유독 추워서 카메라가 꿈쩍도 안 하기가 일쑤였다. 결국 카메라 밑에다가 숯불을 피워서 따뜻하게 하고 촬영을 했다. 드디어 추위와 가난과 싸우며 고생고생 촬영 막바지에 이르렀다. 역시 혹독하게 추운 2월에 엔딩 장면을 촬영했다. 표독스러운 계모 허씨 역할을 한 석금성이 이미 세상을 떠난 장화와 홍련을 죽이겠다고 나섰다가 둘의 혼에 홀려서 연못에 빠져 죽는 장면이었다.

당시 스태프 막내는 막 영화계에 입문한 임권택 감독이었다. 임권택에게 "야, 여자가 연못에 들어가는 건 좀 안 됐다. 네가 좀 대역을 하라"고 말했다. 임권택이 답했다. "저는 영화도 처음 시작해서 모르는데, 대배우의 대역을 제?어떻게 해 내겠습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석금성도 옆에서 듣고 있다가 "아 그건 내가 직접 하겠습니다. 시간을 한 10분만 주십시오"라고 거들었다.

10분의 시간이 지난 뒤 석금성이 준비가 다 됐다고 해서 촬영에 들어갔다. 그런데 연못으로 걸어 들어가서 물속으로 잠기는 장면에서 석금성이 연못 가운데로 들어가더니 거꾸로 발딱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 직접 하겠다는 연기가 저런 연기를 하려는 것이었나'하며 커트도 안하고 카메라를 계속 돌렸다. 다리만 공중으로 뜨고 밑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뒤늦게야 알고 '뭐가 잘못됐구나' 싶어 커트를 외치지도 않고 석금성을 건져 올렸다. 알고 보니 이 분이 플라스틱으로 바지를 해 입었는데 이게 물속에서 공기주머니 역할을 하게 되니 몸이 거꾸로 처박힌 것이었다. 조금만 더 방치했어도 큰 일 날 뻔 했던 아찔한 사건이었다.

'장화홍련전'은 유령 장면이 유난히 많았다. 지금 같으면 와이어나 다양한 특수효과, 컴퓨터 그래픽 등이 동원 됐을 테지만 당시에는 그런 특별히 고안된 첨단 장치가 없었다. 현장에서 갖은 창조적 수단을 동원해서 순발력 있게 촬영을 진행해야만 했다. 예컨대, 장화와 홍련이 공중으로 스윽 날아갔다가 없어지며 허씨를 괴롭히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장화와 홍련을 카메라 앞에 세워놓고 그들 뒤에 놓인 배경 그림이 그려진 대형 원통을 스텝들이 돌렸다. 회전 속도가 빠를수록 장화와 홍련이 날아가는 속도도 빠르게 보이는 장치였다. 카메라 앞에서는 선풍기로 장화와 홍련의 머리카락을 날렸다. 영사해서 그 장면을 보면 장화와 홍련이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감쪽같았다. 일종의 수동 특수효과였던 셈이다.

또 하나. 장화와 홍련이 공중으로 올라 가야 하는데(요즘 같으면 와이어 촬영을 해야겠지만) 뭐 방법이 없을 까 고심하다가 우리의 전통놀이 기구인 널뛰기를 생각하게 됐다. 널에다가 두 사람을 세워 놓고, 반대편에서 스태프들 뛰어내리면 그 반동으로 두 사람이 카메라 위로 올라가는 움직임을 슬로우 모션으로 찍었다. 슬로우 모션으로 찍어 초당 24프레임이 돌아가는 일반 영사기로 상영을 하면 말 그대로 '쓰~윽' 날아올라가게 보이는 거였다.

유령영화나 공포영화 같은 일종의 표현주의적 영화는 사실주의적 영화에 비해 수많은 특수효과가 사용되어야 그 비현실적인 사실감이 강조되기 마련이다. 몽환적이고 꿈 같은 장면일수록 그 표현주의적 표현은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장화홍련전'은 열악한 제작상황 아래에서 연출자의 상상력과 밤잠을 설친 궁리 끝에 맺어진 뿌듯한 결실이었다.

그러나 난 '장화홍련전'을 통해서 특수 효과를 통한 비주얼이나 유령영화, 괴담영화,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속성보다는 두 자매가 계모와 무능한 아버지로 인해 심리적 고통을 받는 과정에 중점을 두었다. 표현주의적 영화가 무릇 그러하듯 표현주의적 미장센이 사실주의보다 더 사실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형이상학적 주제를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 역시 내 의중대로 비주얼에 경도되기보다는 장화와 홍련 자매가 불쌍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손수건 부대, 고무신 관객이라는 당시의 관객들은 그렇게 영화와 함께 울고 웃으며 스크린과 깊이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