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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정의는 과연 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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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정의는 과연 오고 있을까

입력
2011.04.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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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올림픽이 끝난 뒤 불과 열흘, 흥분과 어수선함이 채 가시기도 전인 10월 16일 일요일 새벽 서울 서대문 경찰서 숙직실에서 졸던 나는 한 무리 형사들의 뒤를 쫓아 수색역 쪽으로 달렸다. 그날 새벽이 나에게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다. 유학을 가기 전인 그 당시, 나는 일간지 사회부 기자였다.

탈주범 지강헌의 절규

북가좌동 현장에는 탈주범 지강헌이 고모씨 집에서 고씨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 중이었다. 인질범 가운데 2명은 권총 자살했고 지강헌은 대치 13시간 만에 깨진 유리창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솟구치는 피에 놀란 인질이 비명을 질렀고 경찰 저격수가 벼락처럼 들이 닥쳤다. 나도 그들을 쫓아 뛰어 들었다. 긴박했던 순간 안방 카세트에서는 음악이 흘렀다.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 였다. "나를 아득한 멀리 데려가 달라 (let me take far away)"는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는 과다출혈로 곧 사망했다. 열흘간 온 국민을 경악과 충격으로 몰았던 탈옥수 지강헌 사건은 그렇게 끝났다.

사건은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한국인에게 잊을 수 없는 비극으로 남아 있다. 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감 중이던 죄수 12명이 호송차를 탈취, 도주했다. 이후 9일 동안 이들의 행적은 '9시 뉴스'를 장식했고 최후 순간까지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면서 온 국민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유선전화로 그와 죽기 직전까지 통화하는데 성공했다. 무려 다섯 시간 이상 계속된 통화에서 그는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 거칠게 살아 온 자신의 생에 대해 연민과 혐오를 동시에 드러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까지 그가 내게 쏟아낸 말은 많고도 애절했지만 꼭 전해 달라고 부탁한 말은 "돈 없으면 죄가 있고 돈만 많으면 죄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유전무죄, 무전유죄'였다. 사건은 훗날 영화 '홀리데이'로 다시 살아난다.

이른바 '맷값 폭행' 사건으로 구속 기소된 SK가의 최철원 전 M&M 대표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 5부(양현주 부장판사)는 최씨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하고 석방을 명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와 합의했고 사회적 지탄을 받은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최씨가 받은 '사회적 지탄'을 감안해 형을 낮췄다는 법원의 설명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거꾸로 말한다면 국민의 법 감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감형했다는 말이 아닌가.

알려진 대로 최씨는 유모(53)씨와 화물차 계약과정에서 야구방망이로 마구 때린 혐의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씨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맷값'조로 공금 2,000만원을 수표로 끊어줬다. 야구방망이 1 대를 100만원씩 쳐서 매질을 했다가 10대를 맞은 유씨가 견디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 1 대에 300만 원'이라며 3대를 더 때렸다고 한다.

되살아난 '유전무죄'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반인륜적 범죄가 아닐 수 없다. 여론이 들끓었고 해외 언론에도 보도돼 나라 망신까지 톡톡히 시켰다. LA 타임스는 작년 12월 1일 '법 위에 군림하는 한국의 재벌'이란 제목으로 세계면 톱기사로 전하며 "한국에서는 나 같은 보통사람들은 그들의 눈에는 하찮게(insignificant) 보인다"는 유씨의 코멘트를 담았다. 이런 최씨이기에 구속 후 불과 넉 달 만에 떨어진 법원의 집행유예 판결은 특별히 나의 고개를 떨구게 한다.

나는 지강헌 사건을 지켜보면서 그를 마지막으로 이 땅에 더 이상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절규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2011년 봄, 오지 않으려 앙탈을 부리던 봄은 마침내 왔다. 하지만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 하는 정의는 과연 어디쯤 오고 있을까.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매체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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