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라! 나는 생양가(生養家ㆍ태어난 집과 양가로 들어간 집) 부모님께 길러진 지 19년. 부모님의 은혜를 만 분의 일도 못 갚고 죽으니 불효가 막심하다. 여러 가지 말을 쓰고자 하나 눈물이 앞을 가려서 못 쓰겠다.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 가치도 없이 죽는 것이 무엇보다도 분하고 억울하다.” 1925년 3월 12일 밤 경기도 부천의 한 야산에서 목을 매 숨진 교복 차림의 청년에게서 발견된 유서의 내용이다. 경찰 조사결과, 그는 경기도사범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 KAIST 전봉관 교수가 쓴 은 “해마다 꽃피는 3월이면 입학시험에 실패한 학생들이 줄을 이어 목숨을 끊었다. 입시 전선에서 낙오한 자녀를 둔 아버지들도 줄을 이어 죽음의 길로 달려갔다”고 적고 있다. 1920년부터 해방 무렵까지 학생들은 극심한 입시지옥에 시달렸다. 사람 구실을 하려면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취학 희망자가 크게 늘었지만, 신식 학교는 태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보통학교 입시경쟁률도 2대 1을 넘어 만6세 어린이가 재수를 하는 기막힌 광경이 벌어졌다.
■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다. 유전과 정신질환 등 순전히 개인적 차원의 자살도 있지만, 대부분은 사회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유명인의 자살이나 언론 보도도 자살을 부추긴다. 괴테가 1774년 을 발표한 이후 젊은 남성들의 자살이 잇따르자, 독일 덴마크 등은 소설 판매를 금지했다. 197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하철 개통 직후 한 청년이 전동차에 뛰어들어 자살했을 때 언론은 이를 생생히 보도했다. 그 후 1년간 40건의 전동차 자살시도가 이어졌다. 기자들이 정신과 의사들에게 자문해 보도에 신중을 기하면서, 자살시도는 연간 6건 정도로 줄어들었다.
■ 우리 청소년들의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다. 신체와 정서적, 지적 변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시기인 데다, 치열한 학업경쟁으로 스트레스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사소한 사건이나 심리적 충동이 자살을 유발하기 쉽다. 전문가들은 학생들이 자살을 통해 절망과 분노, 희망의 상실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가족과 친구, 교사와의 유대가 밀접할수록 자살률은 낮다. KAIST에 붙은 대자보는 “이 학교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교육의 본질은 학생들이 행복하고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성적 나쁜 학생을 낙오자 취급하는 학교에서 자살이 잇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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