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는 의약품은 1만4,000여개로 그 숫자가 주요 선진국의 4~7배에 달해 비슷한 약효를 갖는 의약품의 범람으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효능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지는 의약품은 자연적으로 도태돼야 하지만, 리베이트(뒷돈) 관행 등으로 건전한 경쟁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과잉처방과 약제비 부담 상승을 초래하고, 이는 곧 건강보험 재정 악화로 이어지고 있다.
10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현재 건강보험등재 의약품은 1만4,129개다. 군소 제약회사가 난립하고 경쟁적으로 복제약을 찍어내고 있지만, 등록 순으로 가격차이를 둘 뿐 등록에 제한이 없다. 주요 국가들의 보험등재 의약품 수(복지부의 2006년 조사결과)는 프랑스가 4,200개, 스웨덴 3,152개, 미국 2,000개 이하, 호주 2,506개에 불과하다. 한국은 2007년까지 2만개가 넘었다가, 사용되지 않는 의약품을 정리하면서 그나마 줄어들었다. 영국(1만1,000여개)과 독일(4만여개)도 보험적용 의약품이 많지만, 이들은 사실상 국가에서 진료비 총액 등을 통제하고 있어 의약품 남용 측면에서 한국과는 실정이 다르다.
복지부 관계자는 "보험등재 약품이 많다고 해도, 선택의 폭만 넓을 뿐 골라서 처방하기 때문에 직접 건강보험 재정적자와 연결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건전한 경쟁시스템이 담보됐을 때 가능한 이야기일 뿐, 현실은 딴 판이다. 국내 완제의약품 제약사는 지난해 250여개에 이르는데, 매출액의 약 20%를 리베이트로 쓴다(2007년 공정거래위 대형 10개사 조사결과). 지난해 주요 49개 제약회사의 연구개발(R&D) 비용이 매출액의 6.51%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리베이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리베이트를 받은 의사들은 1개 의약품을 처방할 것을 2~3개 처방하게 되고 이는 건강보험 약제비 부담으로 전가된다. 실제 한국의 처방건당 의약품 품목수는 3~5개로 선진국(1~2개)보다 훨씬 많다. 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중소제약사라고 해도 좀처럼 망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제약사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2006년 치료ㆍ경제적 가치가 우수한 의약품만을 선별해 보험등재 약품을 정리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지난해 이런 계획을 사실상 포기했다. 예를 들어 보험에 등재된 고혈압 약만 769개에 이르는데 제약사들이 자료 제출에 협조하지 않아 평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49개 효능군별로 약값을 점검, 올해 말까지 값이 비싼 상위 20% 의약품의 약값을 20%씩 인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고혈압 약은 올 초부터 인하됐고, 7월에는 순환기계ㆍ소화기계ㆍ소화성궤양ㆍ장질환ㆍ골다공증 치료제 등 5개 효능군의 의약품 가격이 인하된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유럽국가들처럼 동일 성분, 동일 효능의 약품들에 대해 평균가격만 보험을 적용하는 '참조가격제'와 질병별로 의료수가를 제한하는 '포괄수가제', 한해 전체 보험급여액을 미리 정해 놓는 '총액계약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건강보험 지출액 중 약제비 비중은 2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평균(17.6%)의 1.7배이며, 해마다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건강보험은 지난해 1조원 이상의 적자를 기록했으며, 현재의 요율과 제도를 유지한다면 2030년 적자가 5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진희 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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